10 : 나는 누구 인가

여러 시선들 사이에서 진짜 나를 찾는 일

by 중년의 모험가

아이가 좋아하는 SF 소설이 영화로 개봉했다. 두 아이와 함께 <프로젝트 헤일 메리>를 보고 나오며 나누던 짧은 대화는, 나를 길고 깊은 사색의 늪으로 이끌었다.


이미 이십 대에 들어선 첫째는 "책에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는데, 영화는 전개가 참 빠르네요."라며 감상을 전했다.


반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둘째는 전혀 다른 의문을 던졌다. "어차피 우주선에 혼자 있는데 이름이 왜 중요한가요? 끝까지 몰라도 되는 거 아닌가요?"


아이의 순진한 질문에서 시작된 나의 사색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영화 속 주인공은 긴 수면에서 깨어나 기억을 잃은 채, 화이트보드에 가장 먼저 이렇게 적는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최근 들었던 어느 강좌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도서 검색창에 '나는 누구인가' 혹은 'Who am I'를 검색하면 셀 수 없이 방대한 양의 책이 쏟아진다고 했다. 수많은 이들이 그토록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묻고 있다는 뜻일 테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묵직한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이제 막 청년이 된, 그리고 이제 막 사춘기가 된 아이들과 나누기엔 다소 무거운 주제 같았다. 그래서 그저 "설사 혼자 있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단다."라고 가볍게 일러두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나는 누가 되는 것일까?' '반대로 나의 기억은 또렷이 남아있는데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는다면, 그때의 나는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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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주위 사람들과 조금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내가 꽤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나를 겪는다. 평일의 공적인 업무로 얽힌 사람, 주말에 사적인 모임으로 만나는 사람, 혹은 몇 달에 한 번 안부를 묻는 오랜 지인까지. 그들은 내 일상의 전체가 아닌 '자신이 겪은 특정 파편'만을 가지고 각자의 머릿속에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누군가에게 나는 몹시 외향적인 사람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소심한 사람이다. 누군가는 나를 활동적이라 평하지만, 또 다른 이는 나를 정적인 사람으로 기억한다. 나라는 한 사람을 두고, 각자의 경험과 정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러 상황과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나라는 존재의 형태가 이토록 달라진다면, 과연 진짜 나는 누구일까?


파편화된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내 정체성을 조립하기보다, 나를 이루는 핵심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려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의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타인에게 보여지거나 혹은 보여주고 싶은 모습들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헤일 메리>의 주인공을 떠올려 본다. 그는 한때 주류의 생각에 저항하다 나약한 실패자처럼 내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뜬 우주선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진지한 성찰을 멈추지 않았다. 망망한 우주의 먼지 같던 존재가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고, 우정을 쌓으며 결국 세상을 구원해 내는 그 기적 같은 과정이 우리의 삶 앞에도 펼쳐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의 끝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를 정의해 주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나는 나를 누구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제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울을 치우고, 오롯이 나만의 언어로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단단한 삶을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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