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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Jan 12. 2021

애쓴 건 어디로 안 가

삶이 고단하다 느껴질 때 생각나는 한 사람 

요즘 자주 Y언니를 생각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조금 외로워서인지도 모른다. 어제도 채 눈이 녹지 않아 미끌거리는 길을 조심조심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언니 생각이 났다.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향하는 짧은 거리를, 중심을 잡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내가 한번이라도 겁없이 성큼성큼 걸었던 적이 있나, 내게 삶은 늘 얼마간은 고단함을 동반했던 기억. 그러니까 나는, 고단할 때 자주 언니를 떠올리는 것 같다. 


언니는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종류의 말들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관심없어할 거라고 내가 생각하는' '그러나 현재 내게는 꽤 고민스러운' 그런 이슈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언니에게 했고 그때마다 언니는 내 의도와 감정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 놀랍도록 적절한 대답을 해주었다. Y언니는 작가였다. 


글쓰는 사람이니까,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글을 쓸 수 있으므로, 언니가 나의 모든 말들을 그토록 쉽게 알아채는 것이 놀라운 줄을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항상 뒤늦게 깨닫고 마는 것이다. 

아무때나 전화를 걸어 몇시간씩 이야기를 해도 되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그때는 몰랐다. 언니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때나 전화를 해도 괜찮았다. 언니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전화를 걸고 두어번의 신호음이 지나면 어김없이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고, "지금 전화 가능?"하면 얼마든지 "응, 괜찮아."라고 말하던 사람. "뭐하고 있었어?"하면 글을 쓰거나 글을 구상하거나 집안일을 하던 중이었다고 그랬다. 사실 언니가 뭘 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하진 않았으니까, 바로 전화를 건 본론으로 들어가곤 했었다. "언니, 근데 말이야."이러면서 내 얘기를 길게길게 늘어놓았다. 


생각해보니,  내 전화를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던 Y언니가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성적이고 남에게 폐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정 탓이었으려나. 보기에 따라서는 무심하다 할 수도, 과도하게 독립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타입이었는데, 그런 면이 나는 좋았다. 언니와 이야기하다보면 내 공포와 분노와 좀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과 마음을, 숨을 고르고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 암이다."

언니가 반쯤 웃으며 했던 말을 그러니 어떻게 실감할 수 있었겠어. 

이미 26센치에 달하는 암덩어리. 치명률 높은 난소암. 말기. 


Y언니의 마지막 투병에 나는 거의 함께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에서 거의 최고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간간히 문자 정도만 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언니를 챙기지 않고 있다는 무거운 죄책감이 들었다. 어쩌면 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기 싫었던 것일 수도 있다. 뭐 어떻게 말한들 다 핑계일 테지만. 


2014년, 바빴던 한 시기가 마무리가 되고 터키로 여행을 떠났다. 이스탄불과 쿠샤다시에서 머물렀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고, 바닷가에 나가 하루종일 바다를 봤다. 이스탄불에서도, 쿠샤다시에서도, 하루종일 볼 수 있는 바다가 곁에 있었다. 바다를 보면서, 나를 바쁘게 했던 일들을 복기했고(기대만큼 성과가 나지 않아 아쉬웠다), 당시 좋아하던 남자의 헷갈리던 신호를 탐구했고(감정은 명확했지만 감정이 지속되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구상했고(남자가 여자를 두번 살리는 순애보였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한번도 못갔던, 언니가 입원해있는 병원을 찾아가야지 생각했다. 이미 그때 언니는 항암치료도 포기하고 면회도 거부하는 상태였지만(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런 모습'보여주기 싫다고 했다), 떼를 써서라도 면회를 해야지 그랬다. 잘하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언니랑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나는 면회가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언니의 동생과 연락을 했고, 면회는 거절당했다. 언니의 의지도 그렇지만 면회할 상태도 아니라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의 부고가 들렸다. 

좀 이상한데, 당시 썸타던 남자와 데이트 중에 언니의 부고를 들었다. 밤이었는데 우리는 교외 바닷가에 있었고,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차를 타고 서울로 달렸고, 그 이후 그 썸은 끝났다. 별로 좋은 남자가 아니라서 언니가 말려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 또한 참 Y언니다운 일이다 싶다. 


꽤 자주 Y언니 생각을 한다. 삶이 고단할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영민하게 함께 답을 찾아줄 이가 그리울 때면 꼭 언니가 떠오른다. 언니가 떠난 뒤, 아직도 언니만큼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Y언니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니까. 상의하고 싶은 일이 많은 요즘, 부쩍 더 언니가 그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욕심이 많아서 늘 더 많이 이루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내게 언니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애쓴 건 어디로 안 가."

그말은 나의 모든 애씀이 적어도 헛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위로가 된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끔 생각하는 것이다. 언니가 애썼던 것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언니도 엄청 애쓰면서 살았는데 애쓴 것의 반의 반도 못 누리고 갔잖아. 



*사진은 2014년 터키, 쿠샤다시의 호텔 방안에서. 커피. Y언니도 커피를 좋아했었다. 여의도의 한 카페 창가자리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오래오래 이야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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