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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Jul 28. 2020

녹차요거트 아이스크림

어떤 구썸남의 추억 

당일치기로 보성 녹차밭이나 보고 오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그였다. 

사실 그 여행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나도, 그도 몹시 바빴던 시기여서 영화 한 편 같이 볼 짬도 없었는데, 당일치기 여행은 무슨. 

그리고, 생뚱맞게 웬 녹차밭이람? 

그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꼭 보성 녹차밭에 함께 가고 싶었다고 했다. 딱히 보성에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거기 갔던 기억이 있는데, 녹차밭 앞에서 사 먹은 녹차요거트 아이스크림이 참 맛있었다나 뭐라나.      


“녹차밭에 가서 맑은 공기를 쐬고, 그 앞에서 녹차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먹는 거야!”     


그는 이미 확고한 여행의 디테일을 세워둔 뒤였다.      


뭔가 이상해.


내 안 깊은 곳에서 예감이란 놈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솔직히 나는 그의 계획(또는 감성)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던 이유는 그때 우리가 함께 연애의 문지방을 넘기 직전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 이제 우리 함께 손을 잡고 달려볼까요?’ 하며 출발선에 선 연인 직전의 상태. 

그는 "무던한" 내 성격을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았고, 나는 해맑은 그의 얼굴에 대고 ‘나는 무던한 구석도 물론 있으나 상당히 까다롭기도 하지’라는 폭탄을 투척할 만큼 다부지지 못했다. 그가 모처럼 만난 키 크고 잘생긴 남자라는 사실이 당시 내 마음을 약하게 하는 데 큰몫을 했다는 고백도 수줍게 덧붙여둔다.     

전날 저녁,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한데 내일 고속버스 예매 좀 해줄래? 내가 하려고 했는데 야근이라."


나는 흔쾌히 그러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답을 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참으로 상냥했다. 좋아! 무던해 보여!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배우들의 연기를 오래 지켜보니 내 연기도 느는구만. (하!하!하!)

내 연기력이 좋아진 건 사실인 듯했다. 사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분노로 책상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파김치가 되어 막 집에 들어온 후였다. 침대 위로 푹 엎어지기 직전이었다. 나의 노동 강도가 그의 것보다 못할 리가 없었다. 잠이 부족한 것은 그나 나나 매한가지였고, 무엇보다도 먼저 보성에 가는 당일치기 여행을 제안한 건 그였으니까! 그가 몰고 다니던 그의 아버지 소유의 중형차로 우리 집 앞에서 나를 곱게 픽업을 한다고 해도, 천금 같은 하루의 휴일을 보성을 다녀오는데 보낸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는데…….     

허! 날더러 고속버스를 예매하라고?      

우등으로 예매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전화를 끊기 전 그가 덧붙였다.      


물론 나는 잽싸게 인터넷에 접속해서 예매를 끝마쳤다. 

당연히 그가 원하는 우등으로. 

그는 ‘나의 남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때의 나는 세상에 ‘괜찮은 남자’란 아주 드문 족속이라는 사실을, 고통스러운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미 깨닫고 있었고, 웬만하면 그가 그 희귀한 종족에 속해있다고 믿어버리고 싶었다. 괜찮은 남자와 연애의 문지방을 넘는 경험이 너무나 절박했었다고 할까.


드디어 우리는 함께 우등고속버스에 올랐다. 누구와 함께 고속버스를 탄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그가 옳았다. 우등으로 예매하길 잘했다. 그나마 넓어서 편했다.

피곤했는지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등받이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 못지않게 피곤한 나는, 불행히도, 제대로 침대 위에 눕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수시로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예민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나의 무던한 연기가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었겠는가!) 가방 안에서 책을 꺼냈다. 디팩 초프라의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였다. 당시 나는 되는 일 하나도 없이 어그러지는 현실에 분개하기에 지친 나머지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영성관련 서적을 섭렵하며 긍정 마인드 함양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책의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보자는 나의 피나는 노력의 발로였다. 

문득 게슴츠레 눈을 뜬 그가 별 희한한 모습을 봤다는 듯 눈썹을 추어올렸다.      


“책에 밑줄을 쳐?”     


손을 뻗어 책의 표지를 확인해본 그의 말이 이어졌다.


“너, 이런 책도 읽어?”     


그 순간 나는, 비록 우리가 우등고속버스의 2인 좌석에 나란히 앉아있긴 하지만, 우리 사이에 거대한 벽이 놓여있음을 알았다.      


그는 나와 다르다…….    


징후는 연이어 나타났다. 버스가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운전기사님은 오늘 처음으로 이 버스 운전대를 잡은 분이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잘못 타버리는 일은 골목을 잘못 들어서는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턴도, 우회전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버스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헤맸다. 승객들의 짜증이 버스 안에 가득 차올랐고, 나는 차멀미 때문에 괴로웠다. 그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는데, 그의 계획상 행복하고 순탄해야 할(!) 여행을 초짜 운전기사님이 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치를 보느라, 멀미를 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무던한 여자야.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네가 우등을 예매하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 버스를 타지 않았을 거야!)


장장 여섯 시간 가량을 버스 안에서 보낸 끝에, 보성 녹차밭에 당도했다. 

푸른 녹차밭이 구불구불 산등성이를 따라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다만,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내가 너무 피곤했다. 이미 지친 상태로 새벽같이 출발한 데다가 짜증에 멀미까지. 

아, 진짜 싫다, 싫어. 

그는 행복한 여행을 ‘연출’하고 싶어했다. (이봐, 연출자는 나라고!)       


“올라가자.”     


그는 내 손을 잡고 녹차밭으로 가득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다정하게 말한다. 공기 좋다, 그치? 

그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자타가 공인하는 저질체력이라는 것. 그는 내 손을 잡아줬지만, 내 속도에 맞춰주지는 않았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헉헉대는 내 숨소리가 그에게도 들렸는지,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나를 돌아본 그가 씩 웃는다. 그리고 제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      


“무슨 숨소리가 그렇게 거칠어? 할머닌 줄 알겠다.”      


이 자식은 이게 웃으라고 하는 말인 거야?     


순간 그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다.) 살포시 미소를 짓기조차 했다. (과연 미소로 보였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드넓은 녹차밭을 조망할 수 있는 위쪽까지 올라가 그와 함께 경치를 감상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낑낑대며 올라오느라 흘린 땀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몸살이 으슬으슬 올라오는 것 같았다. 탁 트인 풍광이 짜증스러웠다.      


“내려가자.”     


그의 계획대로 여행은 진행되어 가고 있다. 이제 내려갈 차례, 내려가서 녹차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먹을 차례였다.      

과자 위에 초록색과 흰색이 절반씩 섞인 아이스크림이 올려졌다. 

그는 내게 아이스크림을 먹겠냐고 묻지 않았다. 

당연한 듯 두 개를 사서 한 개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잘 먹지 않는다. 위장이 예민해서 찬 음식을 먹으면 바로 속이 불편해지는 까닭이다. 사실 녹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인데, 녹차가 성질이 차기 때문이다. 게다가 으슬으슬 한기까지 느껴지는 중이었다. 그래도 말없이 그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가 내게 아이스크림을 먹겠냐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끝까지 내 불편함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계획 하에 있는 여행을 사랑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나를 좋아한다. 그러니 그와 오랫동안 만난다 해도 그는 나를 모를 것이다. 나의 피로도, 예민함도, 소화불량도, 수면장애도, 식성도, 독서 취향도 그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짧은 여행을 통해 그를 알았다. 그의 무심함을, 배려 없음을, 보수성을, 그리고 모든 일을 ‘계획대로’ 진행하려 하는 융통성 없는 성격까지.     


“나중에 결혼을 해서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온 가족이 함께 호두까기 인형극을 보러 가는,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그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호두까기 인형극을 싫어하는 가족 구성원은 그의 꿈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겠지. 아니, 존재할 수 없겠지. 녹차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는 여자친구가 존재할 수 없듯이.     

돌아오는 고속버스도 우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그는 내 옆자리였지만, 나는 혼자였다. 이 남자와는 끝났다. 내내 예감이 꿈틀댔던 짧은 여행 덕분에. 혼자였다면 절대 오르지 않았을 산 위의 녹차밭 덕분에. 혼자였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녹차요거트 아이스크림 덕분에. 

함께 떠났지만 혼자 돌아온 여행이었다.      


나는 대개 혼자 걸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날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낯선 시간 속에서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내게 독립적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중심적이라 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취향이 분명하고, 나를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관계를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앞으로도 오래, 자주, 외롭겠지만, 배가 아플 줄 알면서도 차가운 녹차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뒤로 한 번도 보성에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다시 가게 된다면,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가 생각이 날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결혼을 했을까. 그렇게 원하던, 매년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호두까기 인형극을 보러 가는 삶을 살고 있을까. 기왕이면 그랬으면 좋겠다.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가 호두까기 인형극을 좋아하기를, 가능하면 녹차요거트 아이스크림도.



* 가끔 서랍속에서 오래된 기억을 꺼내봅니다.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귀여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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