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수백 개의 얼굴과 마주치지만, 기억하는 건 단 하나뿐
오늘 아침 7시 38분, 4호선 사당역. 평소보다 늦어서 조금 서둘렀는데, 문이 닫히는 순간 한 남자가 뛰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가방끈을 정리하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서 뭔가 스쳐 지나가는 걸 봤다. 피로? 아니면 체념? 정확히 뭘까 싶어서 계속 쳐다보려 했는데, 이미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상했다. 하루 종일 그 표정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타인의 내면을 잘 모른다. 심리학자 니콜라스 엡리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고 과신한다. 실제로는 50% 정도의 정확도밖에 안 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추측할까?
어쩌면 그게 인간의 본능이다.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파악해야 생존할 수 있었던 진화의 유산. 지금도 우리는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표정을 스캔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는 건 뭘까?
그 남자는 아마 직장인일 것이다. 검은 정장, 깔끔하게 정리된 헤어스타일, 그리고 급하게 뛰어든 모습으로 봐서는 중요한 회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스토리는 다를 수 있다. 어젯밤 아이가 열이 나서 밤새 간병했을 수도 있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의 약속 때문에 마음이 설렐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지각해서 짜증이 났을 뿐일지도.
우리는 타인의 1%를 보고 100%를 안다고 착각한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 남자를 관찰하는 동안, 나 역시 누군가의 관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지하철 칸 안의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는 내 표정을 읽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본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멍하니 창밖을 보는 직장인? 아니면 뭔가 생각에 잠긴 사람?
실제 내 마음속에는 오늘 해야 할 일 다섯 개, 어제 못한 운동에 대한 후회, 그리고 점심 메뉴 고민이 뒤섞여 있었는데.
결국 우리는 서로의 완전한 스토리를 알 수 없다. 지하철에서 스쳐가는 수백 개의 얼굴, 카페에서 마주치는 시선들, 엘리베이터에서의 어색한 정적.
하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우리에게 상상력을 준다. 타인의 스토리를 짐작해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한다. 오늘 아침 그 남자의 표정이 내게 준 건 바로 그거였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누군가의 순간을 엿본 것. 그리고 그 순간이 나의 하루를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든 것.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서로의 일상 속에서 작은 배역을 맡고 있는 건 아닐까. 주인공이 아닌 단역으로,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오래 기억될 만한 인상을 남기면서.
오늘도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표정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