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로 읽는 재즈 5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에세이다. 하루키는 스스로를 장편소설 작가라고 생각하며 에세이는 ‘맥주회사가 만든 우롱차’ 정도라고 말하지만, 오랜 팬들 중에는 장편으로 입문해 에세이에 정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에세이에서 드러나는 그의 삶은 매우 담백하고 소박하다. 일찍 일어나 20매 정도의 원고를 쓰고,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며, 달리기 혹은 마라톤 연습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게 일상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있다.
그동안 하루키가 출간한 에세이를 보면 ‘맥주회사가 만든 우롱차’ 정도가 아니라 ‘우롱차 맛집으로 소문난 맥주회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화가 안자이 미즈마루와 함께 한 대표작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외에도 여행기 [먼 북소리],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달리기론(論) [승리보다 소중한 것],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대담집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재즈팬이라면 [재즈 에세이]와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는 물론, 프린스턴대학에서의 체류기 [슬픈 외국어]의 ‘누가 재즈를 죽였는가’,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의 ‘타임머신이 있다면 – 뉴욕의 재즈 클럽’,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의 ‘음악에 관하여’,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와의 대담집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등도 흥미롭다.
얼마 전, 문학동네에서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읽었다. 하루키&미즈마루 콤비가 1980년대 패션지 [하이패션]에 연재한 글이다. 당시의 하루키는 30대다. 10년 전쯤 재즈 클럽 ‘피터 캣’을 운영하다 전업 작가가 됐다. 한때 헤비스모커였고, 투표를 하지 않고, 운전도 하지 않는다(현재 투표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사회적 책임을 염두에 둔 발언을 많이 하고 있고, 담배는 피우지 않고, 운전을 잘 한다). 빌리 홀리데이가 싱그럽게 노래했던 30년대처럼, 그야말로 옛날이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에서 ‘LEFT ALONE – 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침’이라는 장을 발견했다. 누락되었다가 이번에 수록된 줄 알았는데 1996년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에도 실려 있었다. 이 글은 서랍 속 편지처럼 때가 되어서야 내 눈에 띈 것이다.
밤 한시 반, 아내가 집을 비우고 고양이 두 마리가 곤히 자고 있는 밤이다. 하루키는 보졸레를 한잔 따르고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를 듣는다. 그가 대학시절 산 [빌리 홀리데이의 혼(Billie Holidayの魂, 1971년 일본반 바이닐)]이라는 앨범으로 중량감이 압도적인 ‘Body Soul’과 ‘Strange Fruit’로 시작해 가벼운 ‘He’s Funny That Way’, 느릿하고 우아한 ‘The Man I Love’ 등을 거쳐 ‘Billies Blues’로 끝난다. A면은 1946년 JATP 라이브, B면은 야마토 아키라가 선곡한 편집 앨범이다. 요즘은 빌리 홀리데이를 거의 듣지 않는다고 썼지만 레코드는 이미 스크래치투성이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는 듣거나 듣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적당히 그녀를 좋아하고 적당히 그녀의 노래를 즐기는 사람은 (물론 있을 수도 있지만) 별로 없다. 하루키는 말한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는 “듣는 이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한들 노력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서랍 속 뜯지 않은 편지처럼 때가 되어야만 눈에 띄고 이해되며, 읽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저절로 해독된다고. 시간과 삶에 떠밀려 조금이나마 홀리데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30년 전 하루키의 통찰을 마주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키 소설에는 여성 재즈 보컬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냇 킹 콜에서부터 토니 베넷, 멜 토메, 빙 크로스비 같은 크루너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에 비해 여성 보컬은 빌리 홀리데이나 아스트러드 질베르토가 몇 번 나오는 정도다. 여성 보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재즈 에세이]에서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피츠제럴드,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에서 애니타 오데이와 준 크리스티에 대해 썼는데 그 글이 기가 막히다.
그런데 최근 몇몇 작품에서 빌리 홀리데이를 만날 수 있었다. 2009년 발표한 [1Q84]와 2019년 작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이나 클리포드 브라운처럼 오래된 레코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된다.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2014)의 ‘기노’는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가 잔향처럼 남는다. 비가 내리는 밤, 홀로 기노의 바를 찾은 여성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신청한다.
“되도록 옛날 것이면 좋겠어요.”
그러자 기노는 ‘Georgia on My Mind’가 들어 있는 ‘오래된’ 콜롬비아 판 LP를 턴테이블에 올린다. 1941년 3월 21일 뉴욕에서 에디 에이우드 오케스트라와 오케(Okeh) 레코드 세션, 즉 셰드 콜린스(트럼펫), 레슬리 조나킨스, 에디 베어필드(알토 색소폰),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 에디 헤이우드(피아노), 존 콜린스(기타), 테드 스터기스(베이스), 케니 클락(드럼)과 함께 녹음한 곡이다. ‘Georgia on My Mind / Let's Do It (Let's Fall In Love)’이 싱글(10인치 78RPM)로 나왔다. 낭랑하고 생기있는 노래에는 훗날의 음울함을 찾아볼 수 없다. 하긴 빌리 홀리데이가 무엇을 불러도 아름답던 1941년이었다. (빌리 홀리데이 ‘Georgia on My Mind’ https://youtu.be/VslwkqbMNSk)
무라카미 하루키가 추천하는 빌리 홀리데이 앨범은 콜롬비아에서 나온 [The Golden Years Vol.1]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의 노래를 담았다. 그 속의 빌리는 “기적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싱그럽고, 또한 완벽하다. 위태롭고, 확고하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행복하고, 그리고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다. 어이없을 정도로 무방비한데, 그러나 손대기는 어렵다.”
나는 말년의 빌리 홀리데이만 들었다. 첫 소절부터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I’m A Fool To Want You’ 같은 노래들이다. 30~40년대 풋풋한 노래는 그녀 같지 않았다. 빌리의 진가는 삶의 회한과 한탄이 노래로 승화된 말년 작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키를 읽으며 다시 만난 빌리 홀리데이는 자유롭고 스스로 빛났다.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지 않았다. 그제야 ‘Body And Soul’이 첫 곡으로 너무 압도적이라는 하루키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되도록 옛날 것이면 좋겠다는 말도.
[Billie Holiday – The Golden Years Vol. 1](Vinyl)
CBS / 1962
A면
1. Your Mother's Son-In-Law
2. Riffin' The Scotch
3. Them There Eyes
4. These Foolish Things
5. Did I Remember?
6. No Regrets
7. A Fine Romance
8. Easy To Love
B면
1. The Way You Look Tonight
2. Pennies From Heaven
3. That's Life I Guess
4. 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
5. This Year's Kisses
6. Why Was I Born?
7. The Mood That I'm In
8. I'll Never Be The S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