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한 모든 날이 좋았다
창밖으로 오페라 [마술피리] ‘밤의 여왕 아리아’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아’ 하는 콜로라투라 창법이 세 살 난 아이에게도 신기했는지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묻는다. 검색해보니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시의회 건물 앞에서 작은 야외 공연이 열릴 예정이었고 우리가 들은 건 그 리허설이었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웠다. 도착하니 잔디밭에 무대가 세워져 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아코디언 연주자 정태호가 연주하는 ‘Libertango’가 흐르던 중이었다. 공연 보겠다던 아이는 막상 밖에 나오자 다른 데 관심이 더 가서 아빠 손을 잡고 저만치 갔다. 덕분에 잠시나마 홀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서기에는 무대도 좁고 사운드도 AM 라디오처럼 아련했지만, 그래도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름 밤, 잔디밭, 음악. 이렇게 가끔이라도 즐길 수 있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는 덕분에 넘치도록 공연을 봤다. 기사를 쓰기 위해 마음 없이 본 공연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자여서 볼 수 있는 공연이 훨씬 많았다. 공연은 순간을 잊게 해주었고 공연장은 천체투영관처럼 신비롭고 나른했다. 그게 좋아서 재즈뿐 아니라 연극이나 무용, 발레, 오페라를 보았고 나중에는 편집장님을 따라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클래식이 생각보다 좋았다. 2014년인가 보았던 서울시향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특히 기억에 남아서 그 익숙한 멜로디가 넘실거리면 지금도 마음이 뜨끈해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재즈 잡지 기자로서 가장 큰 행운은, 축제였다. 기자가 된 이듬해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이 열렸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1년 동안 축제에 갔으니 나의 재즈는 자라섬과 비슷한 시간을 걸어온 셈이다. 거의 매년 프리뷰와 리뷰를 썼고 한두 해 정도는 프로그램 북에 아티스트 소개를 썼다. 못해 본 건 자라지기와 스텝 정도인데, 기자라는 직책을 남용(?)해서라도 자라지기를 해보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 관계자로부터 자라지기의 즐거움에 대해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이도 여건도 되지 않지만, 아이가 자라서 재즈를 좋아하고 자라섬에 가고 자라지기가 된다면 그것도 즐거울 것 같다. 17년은 지나야겠지만.
자라섬의 기억은, 모든 기억이 그렇듯 아련함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차 시간 때문에 음악을 뒤로 하고 걷던 길에는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고, “우리가 뭐 재즈 아나?” 라면서도 기분 좋게 웃던 주민들이 있었고, 빗속에서 “I’m Crazy, You’re Crazy, We’re Crazy”를 외치며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들었던 커트 엘링이 있었고, 재즈를 들으며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던 나의 젊은 날이 있었고(언젠가는 다음날 위액까지 토한 적이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 재즈 페스티벌을 즐기던 나의 아이가 있었고.... 그렇게 마지막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줄 서 있다가 물끄러미 본 메인 스테이지, 프리저베이션 홀 재즈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넘실거리고 그보다 더 커다란 물결을 이루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엔딩처럼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마다 꽤 많은 꼬투리를 잡아 기사를 썼다. 그럼에도 자라섬과 함께 한 모든 날들은 좋았다.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중첩되고 왜곡되고 미화되어서 더더욱 좋았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첫 회 내한했던 에스뵈욘 스벤숀 트리오(e.s.t.)다. 반했다는 표현은 좀 식상하지만 여하튼 나는 그들에게 반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대단한 뮤지션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라섬에 반했다. 그 후 피아니스트 에스뵈욘 스벤숀이 사망할 때까지 아이돌을 추종하듯 팬질(?)을 했다. 그들의 음악은 낯섦을 이야기하기보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새로운 음악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빚어내는 선명하고 조화로운 사운드, 아름다움과 몽환적인 감각을 오가는 멜로디와 비트. 글을 쓰며 ‘Strange Place For Snow’를 되짚어보는 지금도 그 음악에 심장이 죄어오듯 두근거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드넓은 설원처럼, 높은 해일처럼, 음악은 이미지를 지니고 다가왔다.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지 못하는 내가 재즈 잡지에서 오래 일을 하고 재즈를 좋아했던 이유도, 재즈가 그려내는 이미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2008년, 에스뵈욘 스벤숀이 사망했다. 40대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그랑블루]의 마지막 장면처럼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믿기지 않는 비보에 내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진 것만 같았다. 그 후 몇몇 뮤지션을 좋아했지만 열정이 다시 타오르지는 않았다.
2017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 내한한 아티스트에 대한 에피소드.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와 울프 바케니우스는 각각 자신의 아들과 함께 내한한다. 리 릿나워의 아들 웨슬리(웨스) 릿나워는 드럼을 연주하고 울프 바케니우스의 아들 에릭 바케니우스는 기타를 연주한다. 웨스 몽고메리와 에릭 클랩튼이라는 자신의 히어로 이름을 아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대가의 자리에 오른 그들에게도 설레던 시절은 있었을 것이다. 처음 기타를 잡았던 순간, 귀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음악을 만났던 순간, 좋아하는 곡을 만족스럽게 카피했던 순간... 잊힌 줄 알았던 그 순간은 강한 힘으로 우리를 다시 음악 앞에 데려다놓는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나러, 자라섬에 간다.
(재즈피플 2017년 10월호, 최종수정 19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