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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Mar 21. 2021

글이 되는 영화

이상용 평론가의 『봉준호의 영화 언어』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이상용 평론가께서 강의를 하셨는데, 당시엔 저학년이라 듣지 못했다. 이후에는 내가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아쉽게 강의 들을 기회는 없어졌다.   시간이 지나  감독의 영화 세계를 구심점으로  글을 엮은 책으로 만나게 됐다. 『봉준호의 영화 언어』.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온 부분과 더불어 이상용 평론가의 관점에서 확장된 얘기들을 접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유사와 상사, 상사성의 전략을 연상적 작용으로 연결한 부분이 어렵지 않게 전달됐다고 생각하고, 헤테로토피아와 관련한 얘기들을 봉준호 감독의 근작이 지닌 지점들로 연장시킨 것이 의미 있었다. 책을 읽으며 붙인 많은 수의 인덱스 스티커가 흥미로운 부분들을 대변해 준다.      



책에서 니체의 문장을 인용하여 괴물의 추격자가 괴물과 흡사한 속성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부분이 있다. (<마더>의 엄마와 <기생충>의 기택을 예시로 든다.) 그러면서 “쫓는 자의 위기는 이러한 심연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하는데, ‘쫓는 자의 위기’를 바라보는 나와 이상용 평론가의 방향이 조금 달랐다.      


쫓는 자의 괴물 같은 내면을 발견하는 것은 순간이 가져다주는 위기라기보다 징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해당 글의 앞선 챕터에서는 대타자(지젝•라캉 논의에서의 대타자. 윤리적 믿음 등의 상징적 효력)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데, (이 논의를 끌고 오자면) 인물들이 잊고 있던 대타자에 대한 인식이 위에 얘기한 ‘순간’에 말 그대로 출현했을 뿐, 위기는 영화의 어느 시점 이후 계속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쫓는 자의 위기가 표면에 드러나는 순간 이미 영화 속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라거나 혹은 서사의 변곡점으로 작용한다는 해석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 위기는 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잠복해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인물에게도 마찬가지고 영화 밖 일종의 대타자인 관객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책의 특성상 모든 부분을 상세하게 적어내기는 어려웠으리라 본다.      


일관된 목소리로 한 감독의 영화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항상 경외롭다. 보는 것만큼이나 글을 통해 접근해도 재밌는 것이 영화다.     


“집을 나온 자만이 언젠가는 새로운 식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흔들리는 집의 위기 속에 목적을 향하는 빛이 있고, 찾는 자의 클로즈업이 있으며, 허망하게 부서지는 이미지와 죽음이 있다. 봉준호의 영화는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흔들리는 이미지를 이어간다. 이미지의 불꽃놀이가 끝날 때 관객들은 <흔들리는 도쿄>의 마지막 대사처럼 비로소 말하게 될 것이다. ‘흔들린다.’ 그것이 봉준호의 영화가 도착하려는 최종 목적지다.”_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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