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 앞에서 발견한 다른 가능성.
최승자 시인의 글을 멋대로 따라가보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글에서 죽음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쫓는 것인데, 20대 때부터 죽음의 문턱을 낮춰 그 경계를 오고 가던 사람이 어떻게 자기 밖의 세상으로 눈길과 손길을 돌렸는지 궁금증이 커졌다.
‘20대 중반부터 이미 쓸쓸함을 안다’라고 쓴 그의 말이 결코 포즈가 아님은 시 몇 편만 읽어도 알 수 있기에 더욱이 그랬다. 물론 젊을 때 쓴 작품은 비관을 축으로 삼고 시간이 지나면서 달관에 가까운 낙관을 품게 되는 다른 작가들의 글도 적지 않으나 최승자가 지닌 정체성과 시는 남다르게 느껴진다. 그의 시가 일종의 ‘만국 공통의 불화’를 예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최승자 시의 화자가 느끼는 절망이 무연한 누군가의 절망이 아니게 느껴지는 순간은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시와 세상의 정경을 이미 예비하고 있는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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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욕심을 낸 주제는 80년대 동맹파업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의 사회 인식과 투쟁 방식을 최승자의 시와 함께 놓고 보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작품에 시대적 알레고리를 관습적으로 갖다 비추는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의미에서 최승자의 초기 시를 단독자의 서사로 놓고 여성 노동자가 사회를 바라보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과 어떻게 엮일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고 싶었다.
최승자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우리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기에 오히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절망 이후에도 살아 숨 쉴 것이라는 지독한 희망과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한 달 초과근무 시간만 110시간이었던, 그래서 경제적 자아 외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80년대 구로공단 여성노동자들이 그 자아마저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눌러 담고 낸 목소리가 앞서 말한 희망과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