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문 - 무수천 - 탐라계곡 - 돈내코 - 안덕계곡
"제주의 웬만한 관광지나 올레길도 다 섭렵했는데 꼭 가 볼만한 비경이 있는 곳을 추천해 주세요."
"오름이나 계곡은 어때요?"
"계곡이 더 좋을 것 같네요."
제주에도 계곡은 있다. 물이 금세 땅 밑으로 스며드는 화산섬이라 대부분 물길은 비올 때만 흐르는 건천이지만, 몇몇 계곡에는 물에 발 담그고 쉴 수 있는 아름다운 물길이 숨어있다. 특히 이 계곡들은 관광객이 아닌 제주 주민들이 즐겨 찾던 나들이 장소였다. 육지에서 온 관광객이 바닷가에서 짠물에 몸을 담글 때 제주 토박이들은 이 계곡을 찾아 시원한 민물로 멱을 감았다. 제주의 풍경이 뭍과 다르듯 제주의 계곡도 육지의 것과 느낌이 다르다. 신화의 땅 제주의 신령스러움이 집약돼 있는 느낌이랄까.
모두 사람이 뜸한 계곡 다섯 곳을 추천한다. 이중 돈내코의 원앙폭포는 여름 한 철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제주의 계곡은 사시사철 어느 때 방문해도 제주만의 독특한 운치를 선사한다. 암튼 계곡을 방문할 때는 큰 비가 오고 난 뒤 하루 정도는 지난 후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제주시를 관통하는 한천 상류 약 6km 지점에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이 신선을 만났다는 전설을 가진 방선문(訪仙門)이 있다. 오라올레를 이용하면 방선문 계곡 탐방과 열안지오름 트래킹도 할 수 있다. 철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지만 특히 5월 초의 방선문 일대 진달래꽃은 영주 12경의 하나인 영구춘화(瀛丘春花)로 무척이나 아름답다. 계곡안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방선문은 영구(瀛邱)ㆍ등영구ㆍ들렁귀ㆍ환선문 등 여러 별칭으로 부르는데, 특히 들렁귀는 제주 고유의 말로 ‘들렁’은 ‘속이 비어 툭 트임’이라는 뜻이며 ‘귀’는 ‘입구’를 뜻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마애명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영조 때 제주목사였던 홍중징의 한시, 등영구(登瀛丘·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곳)가 눈에 가장 잘 들어올 것이다.
역시 제주시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위치한 무수천. 무수천은 8 경이 있다. 하나하나 더듬어 상류로 올라가다 보면 이런 풍경과 맞닥뜨린다. 올라오며 흘린 땀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진다. 더 올라가서 원숭이 얼굴을 한 큰 바위도 만나보라.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한적한 계곡이다. 한 여름 보다는 봄이나 가을에 찾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계곡 트래킹을 위한 기반 시설이 거의 없어서 땀 좀 흘릴 것이다.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다가 구린굴을 만나기 직전에 등산로 우측으로 계곡을 훑어보면 나타난다. 등산로에서는 이런 풍광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다. 살짝 숨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계곡으로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까짓 정상까지 갈게 무언가. 그냥 주저앉아 녹색의 향연에, 계곡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몸을 맡길 뿐;;;. 근처에서 불쑥 노루가 나타나도 놀라지 마시라. 한라산이 아닌가. 그대들은 스쳐지나가는 땅이지만 노루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물빛이 있을까 싶은 돈내코의 원앙폭포. 여름철에는 이곳이 풀장인가 할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한 여름 휴가철만 비키면 그야말로 한적한 비밀스러운 나만의 계곡 풍경을 보여준다. 한 여름에도 저릴 정도의 차가운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른다. 발만 담그고 있어도 좋을 것이다. 세상살이에 지친 몸을 쉬게 만드는 곳.
추사 선생이 좋은 찻물을 얻기 위해 자주 방문했던 안덕계곡의 창고천. 지금은 상류에 축산시설들이 많이 들어서서 조금 오염된 느낌이 있지만 과거에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수학여행지로 각광받던 곳이다. 맑은 물만 흐른다면 최고의 경관에 어울릴 것인데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풍광 하나만큼은 도내 어느 계곡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