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비앤비 판 게스트하우스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 또는 사귈 때 그리고 감정이 식어졌을 때, 그 둘 사이에서 나타나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그 미묘한 변화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사랑을 정의해 보겠습니다. 사랑이란 "자신과 타인의 영적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입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인 스캇 펙의 견해입니다만 저도 이 문장에 동의합니다. 이 문장에서 느껴지듯이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행함을 요구하는 '동사'임이 분명합니다. 이 정의는 몇 가지 다양한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목적론적인 정의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의식적 목적과 무의식적 목적이 있습니다. 그 어떤 목적이든 그것이 자신과 상대의 영적 성장을 위함이 아니라면 그 외의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죠. 다소 과격한 인식처럼 보이지만 사랑으로 가득 찬 행동과 아닌 행동을 구분 짓는 아주 심플한 척도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하나의 진화의 과정입니다. 자아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일종의 진화입니다. 인간적인 자신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전보다 엄청난 존재로 성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행위는 그 자체로 자아를 확장시켜 나가는 진화의 과정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발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발전에도 기여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인류 전체에 기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녀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도록 훈련시키기 어렵습니다. 자기 훈련은 포기하고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훈련되어야만 훈련을 시킬 수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넷째로 자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자아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고 또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표현되며,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할 때라야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 발자국 더 내디딜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의지'란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욕망입니다. 욕망만으로는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수 있지만 의지는 '사랑하고 싶다'가 아니라 '사랑하겠다'라는 결단이고 선택입니다.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입니다. 사랑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자신과 타인의 영적 성장을 같이 고민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흔히 봅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대개 사람들은 사랑을 하나의 특별한 감정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깊이 빠지면 자신의 모든 감정과 정서를 상대에게 쏟아 붇습니다. 이런 현상을 카덱시스(cathexis)라 부릅니다. 실제로 자신이 어떤 사람과 강력한 감정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경우 상대에게 말로 상처를 주거나 신체를 학대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학대나 모욕을 좀 당하더라도 그것이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믿게 만드는 잘못된 사랑의 개념을 우리가 또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서로 마음의 문을 열었기에 가능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애정과 보살핌의 수준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사랑은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는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로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 같은 자신이 숨기고 싶었던 온갓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조차 숨기고 싶었던 그 수많은 것들을 담담하게 펼쳐 보일 간 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드러남을 막을 방법이 없으니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하는데 괴로움이 나타나니 힘들 수밖에요.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관계를 정리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소모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요. 상대에게 모욕을 주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회피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괴로움을 극복하려 합니다.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꺽이는 것이지요.
괴로움은 일시적인 것이니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며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포장하는 것도 예사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괴로움으로 달려가는 '자유'일 뿐입니다. 상대의 상처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감정의 결에 파도가 치기 시작합니다. 위로하고 감싸 안을 것인지 분노하고 관계를 끊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하기 전에 나의 상처도 같이 드러내는 것이 더 지혜롭습니다. 너한테 그런 아픔이 있다면 나한테도 이런 아픔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남은 것은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수순으로 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지혜롭고 현명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통의 단계에서 조심할 것은 언어와 감정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대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언어능력이 떨어집니다. 단순한 남자들은 직설적인 표현에 익숙합니다. 여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랑의 언어는 직설적이어야 합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나 편견을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솔직한 상태를 돌려 말하지 않고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마저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면 관계의 진전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혼란을 야기하면서 내적 평화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서로에게 솔직해지기 시작하면 소위 말하는 '진정한 사랑'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몇 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 때문에 큰 감정의 진폭은 나타나지 않으나 '자아의 성장 속도'가 달라지는 것 때문에 갈등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대는 수행의 도반입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도달하는 곳은 '완전한 사랑'의 경지입니다. 완벽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떤 일을 해도 내 감정에 미동조차 일으키지 않는 상태. 함께 있어서 충만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 에너지는 둘 사이에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도 흘러나갑니다. 크고 넓고 깊게 보는 지혜로움이 그 둘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로움을 사람들은 리더쉽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으로 완성된 리더쉽은 둘 사이의 에너지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에너지를 증폭시킵니다. 사랑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겠지요.
자 이제 둘은 영적 성장의 마무리 단계로 들어선 것입니다. 확장된 자아로 인해 갈등은 더 이상 의미 없으며 사랑은 이제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영원한 사랑'이란 타이틀을 획득하게 됩니다. 기억하시나요? 처음에 마음과 마음이 만나 사랑이 시작되었다면 그 끝은 영혼과 영혼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런 불멸의 존재가 사랑을 완성시켰다면 그 사랑 또한 그 둘의 육신의 죽음을 뛰어넘어서는 것입니다. 그 둘은 이제 윤회의 사슬을 사랑으로 극복해 낸 것이겠지요. 혼자 수행해서 득도하는 것보다 배나 힘든 것이 사랑으로 득도하는 길입니다. 아니 어쩌면 더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반이 있는 것이 수행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아무튼 사랑은 해탈의 경지로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할 만 하지 않습니까? 이제 사랑의 시작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수행의 도반이 되어줄래?"
사랑받지 못한 것은 '불운'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하지 못한 것은 '불행'입니다. 너를 통하여 나를 알아가는 과정. 너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까맣게 모르고 살았을 나의 오만과 편견, 네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몰랐을 깨진 그릇같이 날카로운 질투와 분노. 너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발현되지 않았을 나의 허영심. 너는 나의 거울. 이런 자기 발견은 십중팔구 결핍의 발견이고, 이 결핍은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상처의 발견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성장시킵니다. 성장의 에너지는 자기의 결핍을 발견할 때부터 타오르기 시작하는 셈이죠. 결국 사랑이란 나를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노년을 걱정합니다. 건강하고 우아하게 늙고 싶은 것이 한결같은 바람이지요. 노년기를 우아하게 보내려면 세 가지를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영혼의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무슨 일에나 함부로 참견하는 습관을 버려야 해요. 셋째,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남을 헐뜯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사람을 흉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독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평-의심-절망-경쟁-공포'입니다. 이 다섯 가지 독약의 양이 많을수록 노년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집니다. 반대로 사람을 우아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묘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여유-용서-아량-부드러움'이죠. 사랑하면 얻게 되는 묘약인 셈이죠.
기독교의 사랑의 정의로 마무리 할까 합니다. 오래 참을 줄 아는 사람은 온유하며, 그 마음에 시기심이 없으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진리와 함께함을 기뻐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내하는 것과 욕망을 내려놓음과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 곧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를 늘 염두에 두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수십억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 사랑하고 갈등하며 보냅니다. 사랑의 정의를 그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