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비앤비 판 게스트하우스
삶은 일종의 여행입니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여행인 셈이죠. 그런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과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고, 사랑받을 또는 할 사람들을 만나고, 죽음도 가를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전 인생을 겁니다. 사랑은 결국 삶의 목적인 셈이지요. 죽음은 뭐 다음에 이야기하고 일단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제한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는 처음에는 굉장한 사랑과 애정을 기울입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천진난만한 모습이 놀랍도록 애정과 자비를 불러일으키지요. 아이가 자라면서 사회적 요구가 그 아이를 짓누르게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주기를 바라죠. 아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상관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아이에게는 사랑의 결핍으로 느껴집니다. 부모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되고, 부모와 진정한 대화가 없이 자람에 따라, 오해가 싹트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라기 때문에 나중에도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펴지 못하고 스스로 제한을 두게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기대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거겠죠.
당신들 모두가 그토록 사무치게 바라는데도 사랑은 왜 그렇게 달아나기를 잘하는 걸까요? 만일 당신 스스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게 되면, 당신의 삶은 무미건조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 본래의 자신과 진실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모든 관계는 정말로 사랑의 관계가 될 겁니다. 기억해 두세요. 사랑의 출발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부터입니다. 거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자기를 자기 스스로 사랑해 주는 것에는 어떤 조건도 따를 수 없습니다. 타인을 위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합니다. 조건이 없다는 것은 이성 간의 사랑이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단언컨대, 인간이란 ‘느낌’에 의해 힘을 얻는 존재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느낌에 의해 힘을 얻는, 생각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에 와서야 사람들은 느낌, 감정, 상상력 같은 것들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상상력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가장 위대한 도구입니다. 가장 위대한 창조의 힘입니다. 당신이란 존재가 본래 창조적이지요. 당신의 물리적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자, 모든 분자가 창조적이고 무한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생각은 당신의 가장 강력한 도구 이상이고,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기(또는 타인)에게 내보낸 것을 자기에게로 다시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고통이라고 믿으면, 사랑의 관계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으면,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진심으로 믿으면, 그때는 반드시 고통이 당신에게 나타납니다.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행복해진다는 상상력은 당신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느낌 또한 당신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데려갑니다. 그 시공간에 제약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무한한 거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정을 두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한합니다. 이것을 나는 사랑의 무한성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성적 에너지를 나는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느낌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해 주고, 받아들이고, 직관적이게 합니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난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싶어. 그냥 느낌이 그래.” 여자들이 그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비웃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논리적이지 않으며, 지성적이지도 못하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여자들의 특징이기도 하구요. 그렇죠? 하지만 인류는 직감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점차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직감을 따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직감은 아주 순식간에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일상사를 쫓느라 바쁘기만 한데, 여러 가지 결정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데, 어느 짧은 순간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안 돼’라는 말일 수도 있고, ‘맞아, 이걸 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바쁘고 조화된 상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소위 직감이라는 것은 여성 에너지입니다. 당신들 모두는 내면의 속삭임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직감과 만나기 위해서는, 전에도 말하였지만 자신의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몸에 어떠한 불편이 오는 것은 당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느낌을 두려워합니다. 인류는 고통이라 불리는 것에, 절망이라 불리는 것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탄생의 순간부터, 최초로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고뇌를 경험한 순간부터, 당신들은 각자 자기 주변에 불가항력이라는 장벽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당신들 모두는 또다시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겁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실망과 슬픔과 고통을 당신들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거기에 단련된 당신들은 그 때문에 고통과 느낌을 혼동합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이걸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삶에 즐거운 상황이 일어나면 ‘뱃속에 있는 느낌의 중심부’가 열립니다. 크게 웃을 때는 복부가 흔들리지 않습니까? 상황이 아주 즐겁다고 느끼거나 크게 웃을 때면, 몸 안의 에너지 센터가 열립니다. 그리하여 복부에서 시작된 기쁨은 아무런 저항 없이 당신의 열린 에너지 센터를 통해 전신을 여행하고, 당신의 가슴은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당신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상황이 나타나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게 되면 그때 복부의 에너지 센터가 닫힙니다. 여러분 각자가 모두 알고 있듯이, 그런 상황이 일어나서 충격과 고통 속에 있게 되면 그건 바로 복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애가 끓는 상황인 것이지요.
이따금씩은 마치 걷어 차인 듯 배가 아픈 느낌을 경험하게 되나요? ‘판단’이란 복부에 꽂힌 날카로운 쇠 발톱과 같아서 에너지는 더 이상 갈 곳을 잃고 맙니다. 그것이 소위 고통이 되는 겁니다. 무엇이 고통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판단입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다른 원인은 없습니다. 고통이라는 저항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판단입니다. 고통은 누적됩니다. 수억 겁을 통해, 수많은 생애를 통해, 당신은 그것을 습득해 왔습니다. 당신들 모두 그것에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당신들의 삶을 거슬려 올라가 보십시오. 어린 시절의 언제인가 당신은 자신을 무가치하고 여기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대단한’ 어떤 일일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일에선가 당신은 ‘돼 먹지 못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슴속에선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습니다. ‘너는 아름답지 않다’, ‘너는 어리석다.’는 소리가 가슴속의 속삭임보다 압도적으로 큽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충분치 않은 존재로 판단하게 되고, 자신을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게 되면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장함에 따라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되지만, 다룰 줄 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 주변에 불가항력적인 벽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 높고 더 두꺼운 벽을 쌓게 됩니다. 당신이 성인이 될 무렵에는 그 벽이 매우 높고 두터워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을 보여주었다가는 상처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고통받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지만, 고통은 다시 반복하여 나타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당신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게 되고,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더, 더, 더 판단하게 됩니다. ‘나는 정부의 희생양’, ‘타인들에게 이용만 당한다’ 등의 관념에 갇히게 되고 그것은 두려움이 커질수록 더 심해집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히 되 비추어 줄 상황과 사람들을 더, 더, 더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게 되는 겁니다. 자 이제 그것이 어째서 돌고 도는 원이 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당신들 모두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는 두렵다’, ‘나는 상처받고 있다’고 말하길 두려워합니다.
당신들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가슴속의 상처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을 바라보길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길 두려워합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충분치 못함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감히 그렇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마음 은밀한 한쪽에서는 자기만 못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자기만의 은밀한 생각들과,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행동들, 자신의 삶 구석구석을 돌아보고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규정해 버리고, 자신은 결코 이곳저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살아가는 형태가 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당신들은 모두 완전함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자기 자신이 본래 신성의 표현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옵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결국 판단이란 것이 더 조화로운 길을 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같군요. 어떻게 하면 판단을 떠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늘 판단하며 살아가거든요. 판단을 사리분별과 혼동하지 맙시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판단은 다음과 같이 말하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 사실은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존재할 뿐이죠.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문화에 자리 잡아 온 것들을 극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건너뛰며 우리들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판단이 아닌 분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방식이고, 저것도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길을 택하겠다.’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보다 불행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 질병, 재난과 마주치게 되면, 이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만 즐거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죄책감은 책임감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런데 책임감은 무엇일까요? 책임감이란 당신의 가슴이 노래 부르고 싶어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가슴의 노래에 반응하는 겁니다. 책임감은 의무가 아닙니다. 당신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노래 부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누구의 행복도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만 책임지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땐 서로가 기쁘게 해주길 바라지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위한 기쁨을 바라게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가운데 결정이 이루어지면, 그건 조화와 안녕과 기쁨을 창조합니다. 사랑이 아닌 의무감에서 무엇인가를 하면, 그땐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걸 모를까요? 누가 아무리 얼마나 많이 미소를 짓든, 무슨 근사한 말을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가슴에 의무로 인한 원망감이 있다면, 모두가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늘 기쁨만이 있나요? 아뇨. 반드시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해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 해 주어야 한다는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내가 조금 희생해도 아니 목숨을 걸기도 하는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사랑한다면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의무감에서 나온 희생이라면 곤란합니다. 타인의 삶에 의무가 아닌 책임을 다하는 것.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의 삶을 책임을 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은 책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존재의 충만함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존재 자체로서 충만해지는 것은, ‘사랑하고 또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매 순간을 충만함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과거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건 ‘지금 여기’를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판단 속에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기대를 덜하게 될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돌고래처럼, 어린애처럼 될 수 있을까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당신은 곧잘 과거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거나 미래의 일로 걱정하곤 하지요. 그럴 땐 그저 이렇게 말해보세요. “또 그러는 군” 그리곤 이렇게 말하세요. “지금 난 무엇을 하려는 거지?” 조금씩, 조금씩 쉬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도 말고 자신을 판단하지도 마십시오. 때때로 다시 사로잡힐지 모르지만, 그땐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미래를 생각하느라 바쁘다 바빠, 이제부턴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미움'와 ‘증오'도 필요합니다. ‘미움'와 ‘증오'도 가치가 있습니다. 대낮의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별은 존재하고 있지요. 사랑이라는 별은 미움과 증오라는 어두움이 있어야 비로소 제 모습을 나타냅니다. 물론 미움과 증오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인생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이런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용서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관계가 힘이 들 때 사랑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관계는 존재의 기초이죠. 우리는 모두 관계 맺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를 지킨다는 것은 늘 힘들고 어려움이 따른다. 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미움과 증오'가 아니라 '수용과 용서'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수용과 용서가 당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존재하는 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라고 가르치죠.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과거 때문에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사실 그건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책감이란 매사에 조건을 달고, 유한한 것을 욕망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으며, 책임지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사랑의 다섯 가지 본질, 즉 ‘무조건-무한성-희생-책임- 용서’의 반대 개념이 바로 ‘죄책감’인 것입니다. 죄책감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의 반대 개념인 ‘사랑’을 껴안아 버리면 그땐 죄책감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과거를 바꿔버리면 당신은 강해집니다.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사랑의 다섯 가지 본질을 들여다보면서 최종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사랑은 영적인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서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에너지는 더 큰 진동을 만들어내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길 소망합니다.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