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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Jan 18. 2024

The Man I Love

Herbie Hancock [Gershwin's World]

  낸시 윌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끝부분에 조니 미첼이 노래한 <The Man I Love>를 슬쩍 언급했었다. 사실 조니 미첼이라면 그렇게 스쳐지나기에는 아까운 느낌이니 이어가 보도록 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팝 음악은 서양의 수입품이지만,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뒤떨어지던 시절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레코드판을 구해 미국이며 영국의 밴드들을 탐닉하고 있었다. 가요는 좀 수준이 낮은 음악, 그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조금 씁쓸하긴 한데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늘 있어왔지만, 그 뒤에 있는 작편곡과 연주, 제작의 수준이 올라오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퀸시 존스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를 프로듀스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카운트 베이시며 프랭크 시나트라 등의 빅밴드를 편곡하며 다져진 사람이다. 대충 감으로 음악을 한 게 아니란 얘기다. 데이빗 포스터가 화성을 다루는 것을 들여다보자면 늘 듣던 음악인데도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직관으로 시대를 앞서가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쌓여 있는 것이 영미권의 대중음악의 세계니까, 알면 알 수록 경이로움이 생긴다. 그 주변에는 수많은 one hit wonder들도 있는데, 제법 좋은 음악들도 많다. 그만한 작품을 지속해서 끌어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지, 대부분의 히트곡들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살 만한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니 미첼이라면 아마도 <Both Sides, Now> 일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음악 팬들은 이게 좋은 노래래, 빌보드 차트 몇 위까지 올랐다구, 하며 귀 기울여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게 몇 번 듣고는 제법 좋은걸, 하고 넘겼을 것이다. 그럴만한 게, 젊은 시절의 조니 미첼은 꽤나 맑고 높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 한대의 스트럼 위에 별다른 기교 없이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했다. 가사는 중간중간 몇 단어만 들릴 뿐이지만 그건 팝 음악은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누군가의 마음은 두드렸을 수 있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며 물어봐도 조니 미첼을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음악 팬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사실 모든 문화권이 모든 음악에 동일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겠지.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이 곡의 절반 이상은 가사일 것이다. 기타 반주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평범 이상이라고 할 수 없다. 몇 달 걸려 연습한 서너 개의 코드를 적당히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포크 가수의 솜씨 정도라고 해도 가혹한 평가는 아니다. 뭐, 별거 없는 것 같은데 하고 시큰둥하게 들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영미권의 청중은 다르게 들었을 것이다. I've looked at the clouds from both sides, now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살짝 소름이 끼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어가 서투른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Joni Mitchell의 대표곡인 <Both Sides, Now>


  나는 중학교 때쯤 라디오로 들었는데, 곡 자체는 큰 기억이 없었다. DJ는 "조니 미첼의 명곡이죠, <Both Sides, Now>를 듣겠습니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고, 저양반이 명곡이라고 하니 제대로 들어봐야겠군 하면서 그 길로 동네 레코드가게에 갔다. 하지만 이삼십 분 걸어가는 도중에 곡 제목을 까먹어서 결국은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 나왔던 것만 명확하게 기억난다. 그저 조니 미첼이란 이름만 마음에 숙제처럼 남았다. 언젠가 제대로 한번 들어봐야지 하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묵혀둔 숙제를 삼십 년쯤 지나서 풀었다. 


  이 곡이 발표된 1960년대 말에 재즈 뮤지션들은 어떻게 하면 미친듯한 코드 진행을 미친 듯이 연주해 낼까를 실험하기도 하고(존 콜트레인의 경우), 굳이 코드 진행을 연주해야 하나를 의심하기도 했다(오넷 콜맨의 경우). 아니, 그런 탐험을 지속한 지 벌써 십 년도 다 되어가는 중이었다. 기어이 마일스 데이비스는 굳이 어쿠스틱 악기를 고집할 필요도, 스윙 리듬에 갇혀있을 필요도 없다고 선언하는 중이었다. 나는 재즈를 듣고 공부하고 연주하며 내 인생의 대부분을 갈아 넣었고, 이전보다 제법 많은 것을 알아듣게 되었다. 재즈가 가진 화성의 아름다움에 집착적으로 매달리던 시절도 있었고, 리듬의 세계를 훈련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십 년도 넘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렇게 음악적인 훈련을 거친 내가 듣기에 이 곡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잠깐 기타 반주에서 블루스의 흔적이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내 귀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차라리 나이가 많이 들고 난 다음 어마어마한 오케스트라 편곡 위로 부른 버전을 먼저 들었다면 달랐을 것 같다. 세련되고 풍성한 편곡이라 온갖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하다. 똑같은 가사조차도 다른 무게로 들린다. 조니 미첼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고 굵어졌으니 가사가 다르게 들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도무지 세상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맑은 20대 여성의 목소리로 듣는 것과, 이제는 중성적인 느낌까지 드는 50대 중반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이번에는 인터넷의 도움으로 가사를 눈앞에 펼쳐두고 몇 번이나 따라 읽고 불러보며 들었다. 대강의 이야기가 간다. 제대로 해석한 게 맞나 싶어 다른 사람의 번역도 검색해 보았다. 구름을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천사의 머릿결이나 아이스크림 궁전, 깃털로 만들어진 협곡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구름이 해를 가리고 눈과 비를 내린다, 나를 막아선 구름이 없었다면 할 수 있었을 수많은 일이 있다. 이제는 구름의 양 쪽 면을 본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구름의 환영이고 나는 구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1절이다. 역시나 우리말로 번역해 보는 과정에서 라임이 사라지고 좀처럼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건 아쉽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잠잠하게 일렁이는 스트링 섹션 위로 노래를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이 노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편곡자는 구름과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하얗게 눈부시기만 한 구름에서부터 흔들리고 탁해지기도 하는 구름의 혼란이 현악기 편곡에 가득 담겨있다. 이내 더블베이스와 브러쉬로 연주하는 재즈 리듬 섹션이 노래를 받치기 시작하고, 현악기의 다이내믹이 조금씩 올라간다. 어느새 금관악기도 무게를 더하며 후렴구를 부르는 조니 미첼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는다.  2절이 되어 어느새 더해진 금관악기의 무게 위에 조니 미첼은 자기가 조금씩 가진 목소리를 다 내기 시작하고, I really don't know love, I really don't know love at all, 하고 탄식하며 2절이 끝날 때 몇 음 안 되는 소프라노 색소폰 소리가 하늘로 솟아오른다. 이건 굳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웨인 쇼터일 테니까. 이미 이때쯤이면 내 마음은 그들의 호흡에 사로잡혀버린다. 그 후로 지휘자는 계속해서 오케스트라를 앞으로 앞으로 끌어가고,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웨인 쇼터와 함께. 소박한 포크 송에서 출발해 아주 먼 길을 걸어온 음악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 듣고는 원곡을 찾아 듣는다. 역시나 많은 이야기는 이미 거기에 담겨있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리메이크하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곡처럼 할 수 있다면야.

     

  <Both Sides, Now>의 경우에는 뒤죽박죽 시계열이 얽힌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발매된 시기에 처음 듣게 된 것도 아니고(그렇게까지 나이가 많지는 않다), 감동하며 받아들인 건 원작이 아닌 30년도 넘게 지난 뒤에 나온 리메이크 버전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이 시간을 함께한 이들의 감동은 또 다른 세계일 것이다.


  정작 조니 미첼을 제때 발견한 것은 자넷 잭슨의 음반을 통해서였다. 한창때의 자넷 잭슨은 먼저 스타덤에 오른 마이클 잭슨을 넘어설 기세였는데, 나도 자넷 잭슨의 [The Velvet Rope]란 음반은 제법 마음에 들어 반복해서 들었었다. 가끔씩 꺼내 듣는데, 젊은 시절에 듣던 음악이 언제나 그렇듯, 소리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걸 느낀다. 그 뒤에 담긴 의미는 이제 와서 더 명확하게 펼쳐진다고 해다. 


   <Got 'Til It's Gone>이라는 곡은 조니 미첼의 멜로디를 샘플링한 짤막한 모티브로 시작한다. 물론 그게 다른 사람의 곡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자넷 잭슨의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로부터도 이십 년 넘게 지나 조니 미첼의 음반들을 하나씩 들어보다가 갑자기 그 멜로디를 마주치게 될 때까지. 그 목소리를 둘러싼 비트와 랩이 너무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 샘플링이니까 조니 미첼의 목소리를 새삼 발견하는 자넷 잭슨을 운 좋게 제시간에 받아들인 정도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Janet Jackson의 <Got 'Til It's Gone>, Joni Mitchell의 <Big Yellow Taxi>가 샘플링되어 있다.


 

Joni Mitchell의 <Big Yellow Taxi> 원곡, 나름 상쾌한 느낌의 곡에 슬쩍 비판적인 가사를 얹은 게 마음에 든다. 

  

  하여간 이 정도가 조니 미첼에 대한 기억의 거의 전부였다. 팻 메씨니, 자코 파스토리우스와 함께한 라이브 음반 [The Shadows And Light]도 들어봤는데, 좋은 것 같은데 좋은지 모르겠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번 기회에 다시 들어보면 다르게 들릴 것 같다. 아마 그럴 것이다. 




  정작 조니 미첼을 마음 가득 받아들이게 된 건 그녀의 음악이 아니라 허비 행콕의 음반을 통해서였다. 허비 행콕이야말로 살아있는 재즈의 화신 같은 존재이다. 어쩌면 80세가 넘는 지금까지 활동을 지속하는 것 때문에 그 가치를 잊어버리게 되는 존재가 아닐까. 물론 재즈를 조금이라도 기웃거린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허비 행콕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곁에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덜 신화적인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건 좀 많이 불공평한 것 아닌가 싶다. 허비 행콕은 평생 긍정적인 태도로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해왔다. 재즈 뮤지션으로 막 성장하던 젊은 시절의 연주가 고스란히 녹음으로 남아 있는 건 후배 음악인들에게 축복이자 저주이다. 좋은 피아노 터치를 가지고 있는 신예 피아니스트에서 세상을 뒤흔드는 압도적인 연주자로 성장하는 데에는 고작 몇 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장르를 몇 번이고 무너뜨렸다. 어느 시점부터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마일스라는 이름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느껴지는 이들도 많은 모양이지만.


 재즈의 역사를 돌아보면 늘상 새로운 스타일을 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아티스트가 있기 마련이다. 역사가는 그런 이들을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도의 유통기한은 제법 짧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머릿속에서 상상하고는 실제의 연주를 통해 세상에 내놓으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감탄 섞인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몇 년만 지나고 나면, "저 친구도 이젠 별 볼 일 없군, 매너리즘에 빠진 모양이야. 새로운 게 나오지 않는군." 하는 비판을 듣게 된다. 정작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세상에 없던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 스타일 안에서 계속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에게 부여된 몫 이상을 해낸 것이니까. 일생을 통해 그런 혁신을 두어 번 이상 해 낼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허비 행콕은 그 몇 명 중 하나이다. 


  그런 허비 행콕이 존경을 표하는 조니 미첼이라면, 분명 그녀의 음악에는 무언가가 들어있어야 했다. 그 가치를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 스쳐 지나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 봐도 그녀의 곡은 내게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곡, <The Man I Love>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달랐다. 


Joni Mitchell이 부르는 거슈윈의 곡, <The Man I Love>


  조니 미첼은 분명 포크 가수인데, 뼛속까지 재즈인 밴드 멤버들 사이에서 아무런 위화감이 없이 녹아들고 있다. 아니, 적당히 얹혀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 어떤 재즈 가수들보다도 더 재즈처럼 노래하고 있다. 이 정도면 신기할 정도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의아해진다. 나의 경험으로는 어느 날 재즈 곡들에 매료된 보컬 전공자가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좀처럼 비슷해지지 않는 것에 좌절해 가면서 '그래도 이 정도면 얼추 비슷하지 않나....' 하는 느낌으로 노래하는 것이 주변에서 흔했으니까. 근데 평생 조니 미첼은 포크에 기반한 곡을 쓰고 노래한 싱어송라이터란 말이다. 꾸준히 재즈 연주자들과 조우하면서 같이 음악을 만들어 간 건 사실이지만. 역시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는 이들이 가진 장점은 따라갈 수가 없는 걸까 하는 탄식이 나오려는 찰나이다. 


  생각해 보면 팝 가수가 재즈 레파토리를 불러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차라리 흥미로운 결과물은 리키 리 존스처럼 재즈 스탠다드를 제 맘대로 불러제끼는 경우에 나왔었다. 재즈스럽게 불러야지, 하는 가수들의 노래는 언제나 어정쩡하게 어색할 뿐이었다. [Leaving Las Vegas]에 쓰인 스팅의 <Angel Eyes>나 <My One And Only Love>는 무척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재즈라기보다 스팅의 음악처럼 들렸다. 어쩌면 밴드의 연주가 살짝 가볍게 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재즈스러운 음악, 가수 뒤에서 반주하는 재즈 풍의 영화음악이군, 하며 녹음했을 수도 있다. 그 시점에 세션 뮤지션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그들 누구도 이 곡에 목숨을 걸 듯 연주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영화음악으로 쓰이기에 충분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래가 곧 이야기라면, 진심을 다해 대사를 읊는 배우의 어조와 크게 다를 게 없지 않을까? 하지만 감정을 전달하겠다고 힘이 잔뜩 들어가면 부자연스럽다. 사람 자체가 거대한 존재여야 한다. 그래야 목소리에서 힘을 뺄 수 있다. 그렇게 나직하게 툭, 던지는 가사에 얹힌 목소리가 음악의 공간을 가득 채워야 한다. 그런 경우라면 그 뒤에 있는 모든 악기의 소리에서 강렬한 기운이 뒤섞여든다고 해도 주인공이 바뀌지 않는다. 허비 행콕이며 웨인 쇼터의 연주에 잡아먹히지 않는 노래라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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