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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비 한 May 29. 2023

당신은 장애인 차별자입니까?

우리는 장애인 차별 문제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나는 최근 1년간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뉴스로 접하게 되면서 장애인 차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상적인 논리로 따지자면 장애인 차별자들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당신은 장애인 차별 문제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 답에 논리 정연하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장애인 차별 문제는 대중의 삶에 심각하게 스며드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결책이 멀게만 느껴진다. 이런 물음에 자문자답하다 보면 자연스레 스무고개가 시작되고 내 양심을 건들게 된다. 나는 내가 비장애인이란 이유로 장애인 차별 문제에 소홀한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번을 계기로 장애인 문제에 대해 공부를 시작한 나는, 장애인 차별 문제가 장애인 개인의 문제로만 결부시되는 것이 엄청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장애인 고립화 문제를 나타낸 일러스트 Copyright ⓒ J.B. Han all rights reserved.


심각한 장애인 고립화 문제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교통약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모든 교통수단 및 여객시설과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권리를 말한다. 즉, 이동권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인간의 자유 권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비장애인 중심의 도시개발로 인해 빽빽하게 늘어선 건물과 듬성듬성 금이 가있는 수많은 계단으로 인해 교통약자 장애인의 삶은 하루하루 고비가 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단기적 고립으로도

엄청 찡찡거렸던 기억

최근에 코로나를 통해 이동권이 제한 등 여러가지 경제적 문제가 겹치면서 얼마나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주는지 비장애인들도 체감했을 것이다. 코로나가 부른 단기-장기적 고립화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환자는 끊임없이 늘어났고 결국 코로나블루(코로나 사태를 겪은 우울증)라는 신조어도 낳았다. 장애인들은 이 같은 문제를 지난 십수년간 겪었고 감내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20년 동안 이동권 쟁취 문제로 투쟁을 해왔다. 그들의 소리가 없었다면 저상버스, 지하철 내 엘리베이터 설치는 지금까지 꿈도 못 꿨을지 모른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뭐 하는가 수시로 고장 나는 엘리베이터 운영부터 열차와 승강장 간의 간격과 높이 차이 때문에 휠체어가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또한 자주 일어나는 리프트 사고 때문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무서워서 리프트 앞에서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매일 망설이고 있다. 교통수단 문제는 여럿 존재한다. 내가 오늘 걸어온 길만 해도 너무 좁고 울퉁불퉁해서 뒤뚱거리면서 걸어 다녔는걸 말이다. 이처럼 한국에는 아직까지 교통약자를 위한 실질적인 제도 및 교통시설이 많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러한 이동의 큰 불편함이 결국엔 집 밖을 나가기 두렵게 만드는 고립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와 저학력 장애인의 빈곤률

비장애인 주류 사회, 비장애인 중심 도시개발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동권 침해 문제다. 이동권의 문제는 곧 장애인 고립화 문제로 이어지며 사회와의 단절, 생존권의 문제까지로도 연결된다. 심지어 교육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나라인 한국에서 장애인 중 37.6%가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이하인 것이 보건복지부 통계를 통해 나타났다. 낮은 학력은 빈곤률과 연결된다. 이러한 사실에도 장애인 차별 문제를 방치하고 회피하는 정부의 태도가 가해자의 태도가 아님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서울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전장연에게 정책 검토 계획에 대한 소식은커녕 고소장을 날렸다. 만약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극단적 시위가 없었다면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정부는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 극단적으로 치닫기까지 얼마만큼 이 문제는 방치해왔던 것이며 대체 왜, 장애인과의 화합과 반성은커녕 대립구도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인가.



장애문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장애인 문제를 방임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자본주의가 낳은 이기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꼬집을 필요성이 있다. 봉건시대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오면서 급속화된 자본주의의 발달은 농촌을 공장화하고 농지를 잃은 농민은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잃고 노동자로(소부르주아, 노예 포함) 전락하게 된다.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기계의 발전과 도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자본가는 당연스레 무한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교육시키고 정당화하며 인간의 노동을 더 빠르고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할애하기를 강제화하며 기계와 인간의 속도를 맞추고 기계와 경쟁하는 관계로까지 만든다. 이 과정에서 근대 노동자로서 적응할 수 없었던 농민, 노예, 맹인, 농인, 신체적 기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이탈당하고 부랑자 신세가 된다.

자본이 팽창하고 거대해지면서 국가는 효율적인 자본주의 운영체제를 위해 근대적 노동자로서 적응할 수 있는 부류와 적응할 수 없는 부류를 나누게 되면서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탄생된 것이다. 고로 우리는 '장애'라는 단어의 탄생배경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규정,구별되기 시작하면서 장애인 차별이라는 특수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게 '상품화', '부품화'된다.

노동력의 상품화와 이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체계는 인간의 삶에 있어 여러 가지 변화를 불러온다. 상품에 하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은 환불하던가, 버리던가, 또는 헐값에 팔아버리던가 한다. 그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된 인간의 노동 형태는 "자본에 이윤을 주는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가?"로 구분 짓고 결정된다. 이처럼 자본에 최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장애인, 사회 소외계층은 자연스럽게 실업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평균'이라는 수치에 집착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30살에 결혼해야 한다던지, 나잇대에 맞는 평균 연봉을 받아야 한다던지, 여성의 평균적인 미모라던지, 평균적인 성적, 평균적인 성과 등등 '평균'이라는 목표를 안정적인 삶이라 규정하고 우리는 하루하루 '평균'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추상적인 수치는 인간 개개인의 다양성과 환경을 배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리가 사회가 만들어낸 '비표준'에 속하는 장애인을 사회적 도태자로 낙인찍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사회가 만든 차별과

장애인 스스로 극복하라는

괴상한 논리의 모순


TV나 미디어로 스스로 장애의 문제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장애인의 모습을 비춰주거나 장애인의 가난한 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스토리의 전개를 흔히 봤을 것이다. 선의의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장애를 극복하길 바라는 괴상한 논리로 그들을 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장애인은 앞에 글처럼 사회가 만들어냈다. 장애인은 사회적 장애인이며 불안정 노동, 이동권 등 사회가 장애인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 문제를 바로잡고 책임져나가야 하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이다. 장애인이기에 임금을 차별받을 수 있고 작디작아서 보이지 않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모든 문제를 "장애인이니까."라는 차별적 시선으로 회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애인 차별이다. 한 번쯤 스스로에게 '장애'란 무엇인가? 무엇이 장애인을 규정하고 구별짓고 차별하였는가에 대해 인간이라면, 고찰해봐야한다.


불공평한 사회에서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이번 공부를 통해 장애 관련 서적 김도현의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와 마타러셀의 <자본주의와 장애>를 참고하였다. 장애인 차별 문제는 사회의 부조리가 반복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인간의 부품화논리가 심화될수록 심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과 관념들이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 나 자신에게로도 회귀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이동할 자유를 박탈당하고 교육도, 노동할 기회도 평등하게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언제든 나의 자유도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와 나, 타인을 위해 공부하고 생각하고 공감하는 것이 '가식'이 아닌 건강한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인식이 하루빨리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_ 제이비 한

그림_ 제이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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