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요.
회사에 입사한 지 약 한 두 달 차였다. 모든 것이 너무 낯설고 적응하는데 온 힘을 쏟느라 집에 돌아오면 딱딱하게 뭉쳐진 목과 어깨 근육이 느껴졌었다. 모든 것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뭐든 하나라도 더 빨리, 더 좋게 하려다 보니 내 몸이 항상 긴장된 채로 책상 앞에 붙어있었다. 그 와중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회사 분위기가 워낙 프리 해서 오피스에 혼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가 지금 다니는 회사와 합병되기 전, 나는 좀 더 규모가 작은 IT컨설턴트 회사에서 일했는데, 그 당시 디자인팀에는 디자이너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었다.
나를 담당하는 선임 디자이너는 회사에 일주일에 3번 정도 나오고 나머지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주로 한다. 재택근무를 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키우는 개가 아파서 계속 돌봐줘야 되기도 하고, 집에 페인트 공사를 하는데 본인이 가있어야 되기도 하고,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은듯한 기분이면 편하게 집에서 일을 하였다. 그나마 회사를 오는 날도 10시 정도에 출근 후에 오후 3시 정도가 되면 퇴근을 하였다. 다른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로 잦은 재택근무로 간헐적으로 오피스에서 볼 수가 있었다. 한국 회사 문화에서 살아왔던 나에게 재택근무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고 시도조차 해보기 두려운 것이었다. 꼬박꼬박 매일 출근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내던 중, 문득 선임 디자이너가 있는 날 가서 물어보게 되었다.
"재택근무는 얼마나 자주 할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선임 디자이너가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하지. 재택근무에 대해서 정해진 룰같은건 없어. 어디서 일하던지 본인이 정확히 시간을 지키기만 하면 돼. 한국에서도 재택근무들 많이 하니?"
"음.. 나는 한 번도 못해봤어. 직종마다 다르지만 한국의 디자인 회사 같은 경우에는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재택근무를 하기가 힘든 거 같아."
"아, 그러면 재택근무도 좀 해봐! 이곳의 회사 문화를 배우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 말을 듣고 바로 다음날인 금요일, 처음으로 재택근무를 했었다. 속으로 '진짜 안 가도 되는 건가..? 설마 나를 테스트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니겠지..?'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들을 금세 지우게 할 만큼 첫 재택근무의 맛은 달콤했다. 이렇게 그냥 집에서 편하게 일해도 월급이 꼬박꼬박 똑같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새삼 놀라웠었다. 이곳의 근무시간 시스템은 본인에게 모든 책임과 동시에 권한을 준다. 그냥 간단하게 회사에서 사용하는 근무시간을 기입하는 시스템에 들어간 후 몇 시간을 일했는지 기입하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다. 내가 얼마나 일을 했는지, Slack에 얼마나 오래 들어가 있었는지, 그 어느 누구도 관여하지 않고 신경도 안 쓴다. 그냥 내가 기입한 시간이 곧 내가 일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핀란드 노동법에 따라 일주일에 노동자가 해야 되는 최대의 업무시간은 37.5시간이다. 즉 하루에 일을 7.5시간 하면 되는 것이다. 이 기입하는 시스템에 만약 내가 오늘 아파서 일을 5시간만 했다면 다음날, 혹은 주말에 그날 못했던 2.5시간을 더해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내가 일했던 모든 시간을 합산해서 그에 맞게 나에게 월급을 지급한다. 오전일찍부터 일하고 싶지 않으면 오후 늦게 시작해서 일을 늦게 끝내면 되는 거고 7.5시간이라는 시간만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정말로 회사가 돌아갈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투명성, 자유로움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회사를 향한 충성심과 믿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편하고 좋은데 어느 누가 회사를 옮기고 싶어 하겠는가(물론 월급을 더 주는 회사들의 케이스는 별도다)
나 또한 지금도 꾸준히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컨디션이 좀 안 좋은 날, 딱히 지금 당장 할 프로젝트가 없는 날, 혹은 매주 금요일마다 재택근무로 편하게 일을 한다. 누군가는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 집에서 일을 못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오히려 효율성이 극대화된다. 딱히 씻을 필요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절약하며, 집에서 혼자서 집중해서 방해하는 요소 없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무시간도 나 스스로 책임을 지고 정해진 시간만큼 일을 한다.
핀란드의 모든 회사들이 내가 다니는 회사만큼 자유로운 환경들은 아니다. 여기서도 IT회사들이 회사 문화에 신경을 많이 써서 수평적이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지 다른 직종의 회사들은 안 그런 경우가 훨씬 많다. 같은 핀란드에서 일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다른 회사들도 많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이런 회사 임을 알고 지원을 해서 입사하게 된 건 아니었다. 그냥 입사하고 보니까 이런 분위기의 회사였었다. 재택근무의 편함을 알아버린 이상, 이제는 재택근무 없는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