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CSV를 모른 채 QA가 되었다

CSV? 그게 뭔데?

by 유정빈

졸업을 하고, 뭣도 모른 채 제약회사가 ‘몸이 편하다’는 말을 듣고 이쪽 업계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스물다섯의 나는 운동에 푹 빠져 있었고, 그 시절의 최우선 순위는 ‘몸이 편한 직장’이었다.


그렇게 입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다녔다.
놀랍게도 30개가 넘는 회사에서 모두 떨어졌다.
당시에는 뭐가 문제였는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QA라는 직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떨어진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막막해져갈 즈음, 어느 날 누군가 이런 얘길 해줬다.
“제약 QA에 들어가고 싶다면, GMP 컨설팅회사에 먼저 들어가 보는 것도 방법이야. 거기서 문서 작업을 배우면 길이 열릴 수도 있어.”


그 말에 따라, 구직사이트에 ‘GMP Validation’을 검색해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한 회사에서 면접 기회를 얻었다.


“저희 회사가 무슨 회사인지 알고 오셨나요?”
“그럼요, GMP 컨설팅회사 아닌가요?”
“아닌데요.”


그곳은 자동제어설비 회사의 QA팀이었다.
GMP 밸리데이션이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QA 업무와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분야인 CSV(Computer System Validation)를 마주하게 되었다.


입사 첫날, 팀장님은 두꺼운 책 한 권을 내게 건넸다.

GAMP5.
“이거 알아요?” “CSV가 뭔지는 알고 있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책 안에는 처음 듣는 개념들로 가득했고, 눈에 들어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었다.


‘그냥 문서만 쓰면 되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까지 복잡할 줄은 몰랐는데…’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몸이 편해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이 산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사수를 따라 나간 첫 현장에서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두려움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