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도착해서야 정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났다. 너무도 오래도 바랐던지라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불쑥불쑥 걱정들이 엄습했다. 이를테면 긴급하게 처리할 업무가 생겨 휴가를 하루 앞두고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라던가, 아이가 많이 아프거나 열이 나서 여행이 무산되는 종류의 걱정들. 말도 안 되게 낮은 확률의 가능성조차 끌어안고 미리 걱정할 만큼 이번 여행이, 이번 휴식이 내겐 너무 간절했다. 몽글몽글한 걱정들은 비행기가 이륙하고 승무원 언니가 따라주신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홀짝이자 모두 자연스레 소멸되었다.
즐거운 아들의 비행
혁이는 지난 방콕 여행 때 기내식 맛을 알아버린 후 여행준비하는 줄곧 기내식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유럽까지의 비행이 아이에게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아 미리 비행시간을 귀띔해 주었더니 그는 기내식을 두 번 먹고 이번엔 간식까지 먹을 수 있어 오히려 좋다며 원영적 사고를 발휘했다. 기내식이 있어(?) 우리 부부는 크게 안도했다. 첫 번째 기내식이 나오기 전 승무원 언니들이 준비에 바쁘자 한껏 들뜬 아들. 야무지게 선택한 음식을 한상 가득 먹고 헤드폰으로 보고 싶었던 영화, 만화 등을 보며 기내 생활을 온전히 즐겼다. 이내 졸린지 머리는 아빠에게 두고 다리는 내게 뻗어 쿨쿨 한숨 깊게 잠들기도 했는데, 이코노미석도 1등석만큼이나 즐기는 아들이 너무 귀엽고 고마웠다.
한 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하루 반절을 꼬박 쓴, 14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우리는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별 탈 없이 짐을 찾고 나와 우버 타는 곳으로 향했다. 공항 엘리베이터 여러 대 중 우리가 서있던 엘리베이터가 고장인지 한참을 서있어도 운행되지 않는 것 같아 결국 다른 라인으로 이동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점검 중이라는 표지도 없고 뒤에 온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우리와 같은 비효율을 반복하자, 효율충 남편은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어렵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버 승강장에 도착. 예약한 에어비앤비까지 우버를 타고 안전하게 도착하며 첫날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열흘동안 묵었던 우리집. 해질무렵의 정원의 모습을 소파에 앉아 보고 있노라면 영국 문학작품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여행에서 숙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휴양지 여행에선 하루종일 리조트에 머무는 경우가 많으니 그렇다 쳐도 유럽 등 관광일정이 많은 여행지에서 숙소에 비싼 돈을 들이는 것은 자칫 보기에 따라 아깝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편안하고 깨끗한 잠자리와 안락한 숙소가 주는 평안함은 내게 있어 여행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만 런던의 비싼 물가 때문인지 넉넉하게 배정한 숙소 예산에도 불구, 중심가에서는 내가 원하는 퀄리티를 맞춰줄 수 있는 곳이 없었고, 나와의 작은 타협 끝에 시내로부터 대중교통으로 약 30~40분 떨어진 곳의 에어비앤비를 잡았다.
에어비앤비를 정할 때 내가 솔팅한 기준은 이러하다
1) 40~50만 원/1박 2) 독채(1층) 3) 역이나, 버스정류장이 걸어서 5분 내외일 것 4) 호스트가 신뢰 가는 사람일 것 5) 동네가 안전할 것
런던 중심가에서 멀다는 단점을 제외하고 이 모든 요건을 만족하는 곳을 찾아 흡족했고 그 무엇보다 가장 기대가 컸다. 친절하고 세심한 호스트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 기대가 더 커졌는데, 도착하자마자 내가 꿈꾸던 숙소에 부합하는 집인 것 같아 오랜 시간 숙소에 에너지를 쓴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아들과 남편도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자 뭔가 여행의 첫 고리가 잘 꿰어진 느낌이었다.
깨끗한 침구, 디테일한 집주인의 배려와 준비가 돋보인 집이었다.
고단한 하루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깨끗히 씻고 아들은 저 푹신한 소파에서 넘버블럭스를 보고, 난 그런 아들을 보며 음식을 준비했었지.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물과 과일, 가벼운 요깃거리를 사러 집 근처 세인즈 버리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사육당하다시피 먹었는데도 불구, 낯선 나라의 마트에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아 장을 한껏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가볍게 물이나 사러 가려했는데, 두 손 무겁게 집에 도착. 대구 집을 떠나 약 이틀 만에 대륙의 반대편인 유럽에 무사히 도착하여 우리가 함께 식탁에 앉아서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고 감동적인 첫날이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남편이지만 기분이 좋았는지 같이 블랑 한 병씩 하고 푹신한 침구에 몸을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