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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rot Sep 03. 2023

그렇게 일할 거면 거기서 일하지 마세요

콜센터 상담원으로서의 첫날



반갑습니다. 00 카드 상담사 000입니다.




 첫 콜을 받을 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그만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다. 아침 8시 59분, 손가락이 정신없이 떨리고, 식은땀이 잔뜩 배어나기 시작하면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긴장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어찌할 수 없는 긴장과 설렘으로 범벅이 되다가 정신 차리려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9시 정각까지 10초 남짓 남았을 때는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9시 정각이 되었을 때 '삐-'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첫 고객이 인입되었고, 다행히 인사 하나는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카드사 상담사로서 가장 처음 배우는 업무의 문의였다. 다행히 쉬운 문의를 해주셔서 목소리는 무진장 떨렸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용을 쓰며 나름 성공리에 첫 콜을 마쳤다. 그때 얼마나 뿌듯함과 안도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간만에 느껴보는 벅찬 감정이었던 것 같다.








 상담원으로서 첫날 내가 고객님들께 들었던 말들은 꽤나 날카로웠다. 물론 첫날이라 모르는 부분이 많고, 숙달되지 않은 업무도 있기에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봐도 업무스킬도 부족해서 속도도 느리고, 버벅대는 부분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많이 부족하다 느꼈다. 그래서 그날 하루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은 '죄송합니다.'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였다. 그날 신입이라 하루에 약 20~30개의 콜을 받았는데 절반 이상의 고객님들께 죄송스러워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고객님과 상담했었던 기억이 난다. 고객님의 문의는 분명 나 스스로도 아는 내용이고, 할 수 있는 업무였지만 속도가 느리다며 고객님께서 답답하셨는지 못 기다리겠다며 화를 내셨다. 결국 다른 사람을 바꾸라며 소리를 지르셨는데 처음 들어 본 타인의 역정 소리에 손이 덜덜 떨렸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신입 상담원들을 봐주는 팀장님이 곁에 있어서 빠르게 안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고객님의 목소리도 안정되어 갔다. 그렇게 고객님의 문의를 마치고 마무리 인사를 하려는데 헤드셋 너머 고객님의 성난 음성이 들렸다.




신입이죠? 그렇게 일할 거면 거기서 일하지 마세요.





 일침을 날리시고 먼저 전화를 끊으시는데 한순간 멍해져 버렸다. 뒤에 있던 팀장님도 고객님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었나 보다. 멍해진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깨를 두들겨주셨다. '괜찮아' 하며 토닥여주셨는데 그때 순간 울컥할 뻔했다. 처음엔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싶었다가 아. 내가 일을 못 해서 욕을 듣는구나 싶어 수긍하기로 했다. 그때 수긍하지 않았으면 치미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 자리를 박차 화장실로 뛰쳐나갔을 거다. 울컥 올라온 설움을 억누르고 다짐했다. '그래 다음번엔 같은 일로 절대 욕먹지 않도록 업무를 철저히 숙달해야겠다'










 첫날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졌을 때 60대 여성 고객님께서 인입되셨다. 아파트 관리비를 카드로 신청한 적이 없는데 카드로 승인되고 있다며 확인 요청을 하셨다. 간단한 업무였지만 당시엔 신입 나부랭이였기 때문에 슬프게도 아는 것도 모르는 것으로 뇌에서 자동 둔갑되었다. 팀장님께 여쭤보면서 겨우 업무를 재숙지하고 상담을 진행했다. 약 5분 정도 소요되었고, 숙련된 상담원이라면 2-3분이면 끝날 일을 너무 오래 고객님을 기다리게 했기 때문에 죄송한 마음에 통화 도중에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수십 번은 뱉은 것 같다. 그리고 상담이 끝날 무렵, 고객님께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재설명을 요청하셨다. 아무래도 60대 고객님이시다 보니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우셨던 것 같다. 물론 내 설명이 부족했던 것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고객님께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알기 쉽게 설명해 드렸다. '아~ 그렇구나!'하며 일일이 수긍하시고 이해하실 땐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종료하려고 인사말을 전했는데 고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친절한 상담원을 본 적이 없어~ 너무 고마워요 상담원님!
 상담원님 덕분에 내가 오늘 하루 너무 행복해~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에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짧게 심호흡을 한 뒤 고객님께 '저도 고객님 덕분에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고객님도 오늘 하루 마무리까지 좋은 일만 있으시고, 행복하게 보내세요!'라고 인사드렸다. 내 말에 기분이 좋으셨는지 장장 5분 동안 내 칭찬을 거듭하셨는데 부끄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빠르게 상담드리지 못한 것도 죄송한데 칭찬이라니. 너무 감사하고 기분 좋은 통화였지만, 울음이 목소리에 배어 나올 것 같아서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결국 고객님은 나와 한참을 행복에 대한 토론 아닌 토론을 하시다 만족하셨는지 통화를 종결했다.


 상담원으로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바로 안내를 드리지 못했기에 욕을 안 들었으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60대 고객님께서 해주신 칭찬은 그날 하루종일 실수와 느린 상담 속도 때문에 고객님들께 화를 듣고, 욕도 듣고 했던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생각나 더 울컥하게 했던 것 같다. 온종일 욕받이가 된 기분이었는데 가뭄의 단비처럼 칭찬을 퍼부어주시는 고객님과 통화를 하고 나니 엄청난 위로와 격려를 받은 것 같았다. 그래, 난 그 고객님 덕분에 그날 하루 자괴감으로 얼룩진 머저리가 아닌 그래도 해냈다는 행복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상담원으로서 일한 그 첫날, 내 속은 엉망진창이었지만 한 고객님 덕분에 완전한 엉망이 아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 욕을 들은 기억보단 그 고객님의 칭찬이 더 기억에 강하게 남았으니까.


 이렇게 사람은 말이 중요하다. 고작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지옥까지 끌어내릴 수도, 천국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이날 나는 그 고객님께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리고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행복 한 조각을 얻었다.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했던 이 기억들을 이대로 묵히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우울증 극복을 위해 약 2년 반의 시간들을 글로 써보려 합니다. 과연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그저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는 분들 오늘 하루도 파이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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