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상형

by 전찬민





교복을 입고 곱게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방과 욕실을 열두 번 들락 거리며 부산스럽게 빨딱 뛰어다니는

생명체, 그녀는 정말이지 사전적 의미대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살아있는 물체이다.

그녀가 내 삶에 합류된 이후, 나를 힘들게 한 적은 없다 떼를 쓰는 것도 짜증을 부리는 것도 없고 괜한 고집을 부리는 흔한 여자아이들이 할법한 어느 것 하나 그녀에겐 없다. 하다못해 병치례도 반나절에서 하루면 끝! 고열로 힘들어도 끼니는 다 챙겨 먹는다. 마셨나고 확인하지 않아도 이온음료와 귤도 야무지게 먹는다.

그랬던 그녀도 사춘기가 되면서 아이와 소녀를 넘나 든다. 여전히 애를 먹이 진 않지만 기복의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면 정체성과 자아를 성립해 가고 있다.

하루는 불러도 나와보지도 않아 말을 걸까 하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얻어맞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내가 가라앉고 헤맸던 날들처럼 그녀 또한 먹먹한 터널 속에 갇혀버린 걸까, 고독을 감내하고 있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나의 기척에 뒤돌아본 그녀는 입안 가득 간식을 오물거리며 “엄마, 저녁엔 초밥 먹을까?” 명랑하게 말한다.



그렇다 나와 그녀는 얼굴만 닮았다.





결핍과 고독을 알아챈 시기는 초등학교 3년 즈음이었다. 난 그렇게 사춘기가 빠르게 시작되었다. 빨리 시작했기에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는 고요했다.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였고 가끔씩 분노가 터져 나올 땐 그래봤자 내 감정은 오롯이 내가 처리해야 하는 나만의 몫이라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엔 도가 튼 것도 그때부터 잘 훈련해 온 덕이다.

인생은 그렇다. 모든 날이 온전히 나빴다 하기엔 우는 아이에게 눈깔사탕 하나 입에 넣어주듯 그 시절의 달콤한 맛도 빼먹지 않고 준다.


나를 닮았으니 내가 알 거 같다며 마음의 종종 거림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외출하고 귀가하는 길에서 먼저 집에 가고 싶다며 그녀는 우리를 앞질러서 갔다. 자전거 속도를 내며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두려움을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둔갑시켜 남편에게 말했다.

“분명 저 아이도 나와 같이…” 신호등 앞에 버튼을 누르며 남편은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단호히 말했다.


“당신과 시현이를 분리해!

자라 온 환경이 다른데 같을 리가 없잖아.”


너무나 당연하다. 환경이 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무엇보다 내가 이리도 좋은 아빠를 그녀에게 만들어주었다 그 날이후, 남편의 조언대로 그녀와 나를 분리하는 연습을 했다. '나와 다른 생명체'를 되새기며 바라본 그녀는 얼굴만 나와 닮았지 모든 면에서 달랐다. 오히려 남편을 더 많이 닮았다. 분명 둘 중 한 명이 혼났었는데 어느새 같이 혼나고 있는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이었지 싶다.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유별나게 까탈스러운 건 없지만 자신의 기준과 취향이 정확하다. 타협은 하지 않지만 매사에 유연스럽고 성실하며 올곧다. 잘 웃고 잘 웃기고 센스도 있고 감각도 좋다. 발란스를 잘 맞추려 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결정을 해야 하고, 선택을 하면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함께여도 혼자여도 즐거움을 잘 찾고 모나지 않고 편식 없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아니꼬운 사춘기로 집안의 웃음을 주는 거 보면 효도도 잊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산타의 선물포장지와 토이저러스 포장지가 같은 걸 보고 아마도 아빠가 산타일지 모른다는 의심 했지만 굳이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다고 중학생이 된 지금 고백하는 거 보니 처세술도 좋고 샘도 빠른 거 같다. 솔직한 성격이지만 배려심이 깊어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해도 불편하지 않게 한다.

인정도 잘하고 사과하는 것에 두려움도 없다.

며칠 전, 말투에 화가 난 나에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무 강하게 말한 거 같아... 잘못했어요"라는"곰곰이 생각해 보니"라는 말에 진정성이 보여 기특했다. "강한 마음엔 강한 게 말해도 돼. 하지만 이번엔 나쁘게 말했어. 타인에게 어떤 경우에도 가령, 잘못이 상대에게 있다 해도 나쁘게 말하는 건 옳지 않아. 그 차이를 잘 생각 봐" 그녀는 끄떡였다. 난해 할 수 있는 나의 조언의 답을 그녀는 금방 찾아낼 거다. 어쩌면 이미 그녀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라 실수했을 뿐이다.


뛰어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뭐 하나 뒤처지는 것도 없으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제 길만 찾으면 잘 해날 거라고 믿는다. 글을 잘 써서 곧잘 칭찬을 받으니 그쪽길은 어떨까 싶은데 하교 후엔 손바닥 만한 거울만 들여다보며 용돈으로 산 보물 같은 화장품으로 나와 똑 닮은 그 얼굴에 열심히 그림만 그린다. 어설프게 화장한 모습이 가끔은 젊은 시절의 나인 거 같아서 깜짝 놀랄 때도 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고봉밥을 먹고 오늘 하루를 너무 열심히 살았다며 혼자 자화자찬하며 일찍 취침한다. 눈 감으면 어차피 칡흑인데 깜깜한 방이 무섭다는 동생을 오늘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3초 만에 꿈나라로 떠난다.


온전히 나만을 고민하며 살았으면 내 삶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나의 환경이 조금 더 안정적이었다면 나도 꿈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더 10대 답게 살지 않았을까, 나는 늘 어린 내가 가여웠다. 그랬던 내가 엄마가 되어 나를 닮은 그녀의 10대를 한걸음 떨어져 감상하듯 바라보니 나는 나대로 태어나 내 생긴 대로 지났던 터널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남편의 말대로 나와 다른 환경이니 그 영향도 있겠지만 애초에 각자 다르게 태어나 그녀는 그녀만의 터널 지나고 있다.

천성이란 건 그런 거였다.




어느 날, 스치기만 해도 베일만큼 세상살이에 예민해져 모두가 내 눈치 볼 때, 그녀는 성큼 내 곁에 다가와

’人生は山あり谷あり(인생은 새옹지마)’ 라며 너스레를 떨며 "저녁메뉴가 뭘까" 빙그레 웃는다.


그녀는 나와 닮지 않아서 분명 내 이상형이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