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겨울
"등골 브레이커"
짧은 단어 한 개는 논리 정연한 긴 학술 논문이나 다큐멘터리보다 강하다.
2011년 이른 겨울이었나. 갑자기 소집된 회의의 주제는, 누가 만든 말인지 정말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등골 브레이커'라는 별명으로 언론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있던, 신발 N에 관한 것이었다.
중고생 자녀들이 비싼 신발을 사 달라고 너무 졸라서 부모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민원을 넣었던 것일까. 아니, 아마도 중고생 자녀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연배일 공정위 담당 국장님이 직접 조름을 당한 후 이렇게 시작되었을 지도.
"무슨 신발이 이렇게 비싸! 당장 조사해 봐!"
사실 가장 유력한 것은 네이트 판이었다.
나중에 사건 자료를 수집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인데, 누군가 만들어서 네이트 판 게시판에 올린 이미지를 각 언론사 기자들이 받아서 기사를 쓰면서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이 팩트였다. 구제역 역학조사 하듯 수많은 기사들과 게시판 글들을 링크를 타고타고 조사하다보니, 가장 첫 글이 네이트 판에 있었던 것.
지금와서 다시 보니 누끼도 깔끔하게 따고 이미지 퀄리티와 간격 처리도 수준급이다. 아마도 어느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용 이미지 작업을 하던 웹 디자이너의 작품이었을지도.
어쨌든 공정위는 N과 유명 신발 회사들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분명 '등골 브레이커'는 N만 말하는 것이긴 한데, 또 N만 조사하면 뭔가 공정해 보이지 않으니 업계를 다 같이 조사했을 지도. 아멘.
N 담당 임원은 엄청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도대체 우리 N만 왜 몰매를 맞고 있느냔 말입니다. 저희 제품은 K보다 품질은 훨씬 좋은데 가격은 20%나 저렴해요. 그러니까 잘 팔리는 거죠. 대한민국에서는 너무 잘 만들어도 문제인가요?"
나와 선배 변호사는 우선 공정위의 어마어마한 권력 - 공정위는 법원의 영장 같은 것 없어도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회사 컴퓨터를 모두 털어갈 수 있으며, 데이터를 삭제해도 포렌식 팀이 하드 디스크를 떼어가서 다 복원시킨 후에 삭제한 죄가 엄청나게 가중처벌된다 등등 - 을 차분히 설명했다. 이렇게 현실을 좀 설명하면 보통 회의 시간 단축을 위한 본론 들어가기가 빨리 시작될 수 있는데.
아, 벌써 다 그렇게 털리셨다고요.
어쨌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고객님을 진정시킨 후 - 사실 대부분의 첫 고객 회의에서 하는 일이다 - 사건의 전말을 잘 들어 보았다.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것보다 N은 훨씬 더 잘 팔리고 있었고, 회사도 급성장하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담당 임원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품질과 디자인에 대한 확신은 분명해 보였다. 뭐, 유행에 특별한 이유는 없겠지만. 적어도 공정위 담당 공무원이나, 나중에 법원에서라도 뭔가 논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훨씬 좋을 것이니, 우리는 왜 N이 경쟁 제품에 비해 품질이 좋은지에 대해 길고 긴 설명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듣.. 는 척 했다.
사실 절반은, 한글이지만 알아 듣지 못하는 이야기이기 때문.
하지만 이런 지루한 첫 회의는 새로운 사건이 시작될 때 꼭 필요한 시간이다. 변호사로서 사건을 장악하고 이끌어 가려면 그 사업, 그 산업을 적어도 준전문가 수준으로는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사업이나 산업을 더 모르는 행정부 공무원이나 판사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사건의 핵심을 전달할 수 있다. 법만 알아서는 아무런 유효타를 날릴 수 없다.
일종의 통역사라고나 할까.
구글링과 네이버링 시간을 줄이고 새벽에 1시간이라도 더 자려면 회사의 담당자가 실강으로(!) 사업과 산업을 설명해 줄 때 잘 듣고 필기도 꼼꼼히 해 두어야 한다. 질문도 중간중간 던지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증거나 자료는 결국 회사가 알아서 내 주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가 직접 캐내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회사 담당자는 무심코 버리거나 넘겼던 자료 - 사업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업무에 이용하지 않는 - 가 법적 분쟁에서는 결정적인 스모킹 건이 되는 경우가 정말 많다.
* 스모킹 건 - 총알이 발사된 총에서는 연기가 나는 (smoking) 것을 보고 총알이 발사된 총을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어떤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를 의미할 때 쓰는 표현. 물론, 로펌에서나 변호사들끼리 쓰는 용어는 전혀 아니다. (예시) "선배!! 이 증거가 스모킹 건인 것 같아요!" "... 총 맞았냐? 일이나 해라."
그러니 사건 중반으로 접어들면, 회사에서 주는 자료만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가 직접 고객 회사의 담당자에게 이런 이런 자료를 찾아 보시라, 이 때 이런 자료를 만들지 않았느냐, 이 엑셀 표에서 이 숫자는 어떤 의미냐 등등 이런 식으로 사건을 질질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 사건 막판에 가서, 결국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게 중요하면서 지루한 회의가 끝나고, 고객님이 요청한 첫 업무는 공정위 제출자료 업데이트였다. 처음 조사 받을 때 담당 공무원에게, N이 결코 형편 없는 품질로 부모들의 지갑을 터는 '등골 브레이커'가 아니며 훌륭한 제품으로 건실하게 성장하는 중견기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자료를 낸 적 있는데, 이 자료를 보완해서 다시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건 초기에 흔히 많이 하는 업무다.
특별한 법적 쟁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부정적인 언론 보도로 조사까지 하게 된 법적 사건에 대해서는 담당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부터 조금이라도 가운데로 돌려 놓을 필요가 있으니까.
"이 문서를 업데이트해 주세요. 필요한 자료는 요청하시면 따로 드리겠습니다."
어..
그런데 이거 좀 이상하다.
일반 회사에서 만든 포맷이 아닌데. 아니, 어디서 많이 본 양식인데.
잠시 문서의 퀄리티에 의아해서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 회사 담당 임원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어떻게 자료를 업데이트해야 할 지에 대한 생각이 이미 뇌를 침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질문까지는 하지 않았다. 회의도 이미 3시간 넘게 했다고.
하지만 나가면서 알아서 힌트를 주는 담당 임원.
"회장님이 포맷하고 디자인을 엄청 중시하시거든요. 이번에는 꼭 그 부분도 신경써 주세요."
'... 이번에는?'
아. 짤렸구나. 그 전 카운셀이.
뭔가 그 전에 자문하던 로펌이 있었는데 뭔가 불만이 있어서 바꾸는 중이구나. 익숙해 보였던 그 문서의 포맷은 역시 무언가 법돌이의 어쩔 수 없는 딱딱함과 투박함이 스며 있어 친근했던 것이었구나. 회의실에서 나가는 선배 변호사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눈을 약간 찡긋. 맞구나. 허허. 이럴 때는 뭔가 긴장과 함께 승부욕인지 경쟁심인지 모를 아드레날린이 온 몸으로 급 생성된다. 그런데, 내용이 아니라 문서의 디자인이라고? 불안하기도 하다. 패션 회사라서 그런가?
어쨌든 재미 있는 사건을 맡게 되었네.
타임 시트 쓰는 손도 가볍다.
* 타임 시트 (Time Sheet): 변호사, 컨설턴트와 같이 시간 당 자문료를 청구하는 서비스업에서 청구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매일 업무 시간과 업무 내용을 입력하는 시트. 일종의 업무용 일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사건을 끝내고 나면 참여한 사람과 시간이 예쁘게 요약되어 VAT 10%를 붙인 후 고객사로 청구된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작가의 경험을 기초로 각색된 것으로서 실제 사실관계나 사건 내용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