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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변호사 Jun 27. 2018

등골 브레이커의 기억 (3) - 혼란

2011년 겨울

RPM


아마 대부분의 변호사들도 자동차의 엔진 회전 수를 먼저 떠올릴 용어. RPM. 재판매가격유지행위. Resale Price Maintenance. 중요하지 않은 주제는 아닌데, 사례가 많지 않아서 변호사들 중에서도 아주 접하기 쉬운 주제는 아니다. 사실 시험에도 잘 안나오고.


외국어로 따지면 약간 독일어 같은 그런 느낌?


이거 중요하다고는 하는데 좀 어려울 것 같고 열심히 배워도 다른데서 써먹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


나도 그 때까지 그냥 이름은 들어보고 시험 공부할 때 어떤 건지는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막 공부하지는 않았던 주제. 이제 고객님을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다 놓고 구글링부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에 권장 소비자 가격 500원을 써 놓는게 왜 잘못이란 걸까?


RPM이란 어떤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물건을 소비자에게 최종적으로 파는 회사에게 '얼마에 파시오'라고 딱 가격을 지정하면 안된다는 법이다. 왜? 다 그런 것 아닌가?


이런 법이 나오게 된 스토리는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911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잃었던 1910년의 다음 해. 미국에 잘나가는 제약회사 '닥터 마일스'가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게보린이나 아스피린 같이 이런 아주 유명한 약들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닥터 마일스는 전국의 약국에 약을 공급하면서 약 가격을 딱 정해주고 더 싸게 팔지 못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약국들은 그렇게 잘 팔고 있었는데, 한 약국이 닥터 마일스의 지침을 어기고 약을 조금 더 싸게 팔았더니 대박이 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비자들은 단돈 100원이라도 더 싼 곳으로 몰리기 마련이니까.


당시 잘나가던 닥터 마일스의 약 광고


(발번역) 항상 기분이 차분하고 침착하신 분, 불안하거나 짜증날 때가 전혀 없으신 분, 잠 못 이룰 때가 전혀 없으신 분은 이 광고를 보지 마세요. 하지만 긴장 때문에 짜증나고 불쾌하다면? 가만히 있기가 힘들거나 자꾸 들뜨신다면? 잠이 잘 안온다면? 머리가 지끈거린다면? 닥터 마일스 너-빈을 알아보셔야 함! (...)


어쨌든 그러자 닥터 마일스는 그 약국에 약 공급을 중단했고, 약국은 미국의 공정거래위원회라고 할 수 있는 FTC (Federal Trade Commission: 연방거래위원회)에 제약회사 닥터 마일스를 신고해 버렸다. 이 사건은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갔고, 결국 제약회사가 패소했던 것. 더 이상 약국에게 판매가격 정하지 못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사건은 이유를 들어 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하기로 했다.


중요한 이유는, 닥터 마일스가 약의 가격을 딱 정해서 팔도록 했더니 약국끼리 약값을 담합(짬짜미)한 것과 똑같은 결과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딜 가도 판매가격이 같은 것이 소비자 입장에서는 편한 때도 있다.


아이폰 이용자는, 폰이나 정품 악세사리 살 때, 애플 스토어나 리셀러에 가서 구경하다가, 어차피 온라인에서 사도 똑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사게 된다.
그리고 어디에서 물건을 샀는데 다른 데서 더 싸게 파는 것을 보게 되면(...) 사실 기분이 별로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비싸면 안 사면 되는 것 아닌가? N 대리점 간판 달고 옷을 파는데 대리점마다 가격이 다른 것도 소비자들은 피곤할 것 같기도 한데.. 대리점들도 처음부터 정가제로 하기로 분명히 약속하고 팔기 시작했다면 문제 없을 것 같은데.. N이랑 K랑 모든 신발 브랜드들이 다 짜고 가격 맞춘 것도 아니고.. 그래서 최근에 이런 사건은 들어보지도 않고 불법이라고 하다가 이야기 한 번 들어보겠다고 판례도 바뀌었던 것 아닌가?


밤은 깊어가고 판례들은 얽히고 얽혀 간다..


100년만에 바뀐 미국 대법원 판결을 찾아 읽고, 또 우리나라 판결을 꼼꼼히 읽어 본다. 제조사가 물건 팔면서 정가제를 실시하는게 왜 잘못일까..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소비자들한테 좋은 것은 뭐고 나쁜 것은 뭘까.. 같은 브랜드 상품 사이에서 할인 경쟁이 벌어지면 (제조사는 물론이고) 소비자들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말이 될 만한 설득 논리를 찾아 헤멘다.


의뢰인에 빙의하는 것은 변호사의 숙명이다


아니, 의뢰인에 보내 준 자료를 읽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도 어렵다. 이런 순간이 힘들다는 변호사들도 있다. 누군가의 인생에 - 그것도 가장 힘든 순간에 - 개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테니까.


하지만, 변호사가 객관성을 잃는 순간 패소 가능성은 높아진다.


내 생각에는 정말 우리 고객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나랑 고객님 이외에 세상 그 누구도 우리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되면. 사건을 이길 수가 없다.


우리 편을 지키기 위해 모든 머리와 가슴을 동원하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우리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 그게 항상 가장 어렵다.


물론, 남자들은 그러다가 여친에게 박살나곤 한다 (...)


그러다가, 우리 편의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진심 마음 속 깊이 들게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지 뭐.


하나하나 과장된 소문이나 언론 보도를 걷어 내고, 억울한 포인트를 찾아 낸다. 부정적 보도에 대한 오해를 푼다. 왜 정가제를 실시해야 하는지 계속되는 회의와 자료를 통해 다양한 회사 임직원들의 생각을 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소비자 보호'나 '시장 경쟁'의 관점에서 잘 정리한다. 보통 임직원들은 사업적 측면 -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 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소비자나 국가 경제의 관점에서도 좋은 이야기가 섞여 있다. 잘 선택해서 강조하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하기


이걸 잘 해야 한다.


물론, 없는 것을 더해서는 안되고.


하루하루 시간이 갈 수록 혼란스럽다. 나의 마음 속에는 이미 N은 무죄다. 그런데 법은 굉장히 넘어서기 어려운 장애물을 많이 쌓아 놓고 있다.


어떻게 RPM의 산을 넘을 것인가..


어떻게 의뢰인을 보호할 것인가..


어떻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갈 것인가..


* RPM은 1911년 이후 2007년까지 미국에서 이유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불법인 행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까지 그랬다. N 사건이 있었던 2011~2년에는 이제야 "이유를 한 번 들어보고 판단한다" 정도였을 뿐 법원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이유는 없는 상태였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작가의 경험을 기초로 각색된 것으로서 실제 사실관계나 사건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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