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이 기적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대부분의 기억이 떠오르는 가장 오래된 시기인 중고등학교 때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현재의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바로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며칠을 생각해보니 정답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알겠더라.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현재가 기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몇 개의 큰 사건이 아니었다. 순간순간이 모두 중요했다. 사소해 보이는 만남과 대화, 고민과 결정, 노력과 성과,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지금의 내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난 골목대장이었다. 당시 우리 동네는 운동을 잘하면 골목대장이었다. 운동을 너무나도 좋아했던 나는 하교 후 집에 오면 가방을 던져 놓고 골목으로 나가서는 매일 같이 야구를 했다. 당시 집 근처 서울대병원에는 운동장 규모의 공터가 여러 개 있었고, 각 공터 별로 잠실 구장, 인천 구장, 광주 구장, 이렇게 이름을 짓고는 날이 좋으면 매일 같이 야구를 했다. 그렇게 내 초등학교 6년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야구'였다.
당시 내 꿈은 늘 '과학자'였다. 알고 있는 직업이 몇 개 없기도 했지만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 내는 직업, 상상하던 것을 실제 존재하게 하는 직업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저 꿈이었을 뿐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시골에서 다닌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키워드는 '친구'였다. 물론 공부에도 눈을 뜨게 된 시기이고 여전히 운동도 미친 듯이 많이 했지만, 공부할 때나 운동할 때나 내 옆엔 늘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행복했던 기간은 지금까지도 내게 행복하고 즐거웠던 학창 시절로 기억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꿈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의사'였다. 당시 드라마 '동의보감'을 보면서 의사라는 직업의 소명감에 대해 느낀 것이 많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의사가 되었으면 했다. 결과적으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에 대해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꼭 의사여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들어간 학과는 전기전자전파공학부였다. 어릴 시절의 나로 시작해서 스무 살의 공대생으로 이어지는 맥락은 딱히 없었다. 그냥 점수에 맞춰 학과를 정한 나였다.
대학 시절은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글로 다 적을 수 없는 후회할 일들 투성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낮은 학점과 바닥을 친 자존감뿐이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의 키워드는 '패배의식'이었다. 무엇을 해도 안된다는 패배의식이 자존감이 컸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과연 졸업할 수 있을지, 취직은 제대로 할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면 많이 울지 않았을까? 그만큼 미래가 캄캄했었으니까.
이후 내 인생길은 모두의 예상과 늘 다르게 흘러갔다. 공대생이었지만 홍보팀에 취직해 글을 썼고, 다시 커리어를 바꾸고자 주경야독해 MBA를 다녀와 컨설턴트가 되었다. 이후 외국계로 이직해 전략 전문가로, 다시 스타트업 임원으로 미친 듯이 일하다 얼마 전 토론토로 건너와 프리랜서, 아니 노마드로 살고 있다. 억지로 스토리텔링을 하자면 이 모두를 엮어 멋지게 풀 수 있겠지만 실상은 좌충우돌 맥락 없는 전개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 하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갔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의 나는 대학 시절의 나를 떠올릴 수 없었고, 대학 시절의 나는 직장 시절의 나를 떠올릴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지도 잘 모르고 얼떨결에 첫 직장에 들어왔고, 발등의 불만 끄고 살던 내가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걸어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니 신기한 점이 하나 있다. 방향을 정할 때마다, 길을 틀 때마다,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대신 사소한 일들이 수차례 이어지면서 내가 방향을 틀도록 이끌었다. 가까스로 졸업하고 직장을 알아볼 때 어느 회사에 지원해야 할지 전혀 정보가 없었다. 동기들은 수많은 회사를 알아보고 지원했지만 취업이라는 단어가 사치였던 힘든 시절을 겪었던 나는 알고 있는 회사가 몇 개 안됐다. 그래서 전공과 관련 있는 공기업에 가려했다. 물론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전공에 실패했던 터라 전공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붙을 실력도 안됐다. 그러다 공대생들이 가장 많이 지원하는 전자회사의 리크루팅에 참석했다. 전공을 정말 살리긴 싫었지만 취직해서 사람 구실을 하려면 그래도 전공을 살려 전자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확률이 높아 보였다. '일단 붙어서 입사하고 나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전자회사 리크루팅 행사에 참석하고 내려오는 길에 내 첫 직장 선배들이 건물 로비에서 리크루팅 상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있는 동기한테 어떤 회사인지 물었다. 그렇다. 나는 첫 회사의 이름을 그날 처음 들었다. 그래도 내가 이 회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상담 자리에 앉은 이유는 '저 회사 현금 많은 알짜 회사야'라고 말했던 동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재미난 것은 식품 회사에서 공대 건물에 리크루팅 왔다는 건, 공장이나 연구소에서 일할 직원들을 뽑기 위해서였는데 내가 정작 상담하는 직원에게 물어본 것은 '경영 지원 분야에도 공대생이 지원해도 되나요?'였다. 그만큼 난 전공이 싫었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경영 지원 분야에 지원해 홍보팀에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비단 이때뿐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마다 작은 일들 하나하나가 이어져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유독 나에게만 일어났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지금의 내 모습이 지금의 나에겐 익숙할 수 있지만, 10년 전의 나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깨닫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살아오는 길에서 겪은 순간순간이 지금의 나를 빚었다. 그 순간순간마다 조금씩 다른 결정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지금의 나는 소중하며, 기적이다.
오늘의 내가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내일의 나를 걱정한다. 지금도 이렇게 별 볼 일 없고 인생을 헛 산 것처럼 느껴지는데, 앞으로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게 된다. 그러다 보면 '괜히 나서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야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최대한 안정적으로 살아야지' 싶다. 그렇지만 오늘의 내가 기적이라면?
오늘의 내가 기적이면, 그 기적이 만들어 나갈 내일도 기적이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이 괴로울 일이 아니라 설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의 어려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가 있다.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같은 대학에 들어온 친구가 있었다. 당시에는 대학교 운동장에 합격자 수험 번호가 적힌 종이를 붙여놨다. 물론 ARS를 통해도 합격자 확인이 가능했지만 대기자 명단은 운동장에 가야 확인이 가능했다. 전화로 합격 소식을 듣지 못한 친구는 서울로 올라와 운동장에 붙어 있는 대기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다. 예비 2순위였다. 지원한 학과 전체 합격자 20명 중에 최소 2명이 등록을 포기해야 했다. 놀랍게도 3명의 포기자가 나왔고 친구는 기적처럼 입학할 수 있었다. 친구는 어떻게 됐을까?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 후 들어가기 힘들다는 금융 공기업에 입사했다. 친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기적처럼 입학했기 때문에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학교를 다녔어. 나에겐 학교 생활이 선물과도 같았거든'. 오늘의 나를 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다른 무엇보다 마음에 감사가 넘친다. 당연히 부정적인 생각도 덜하게 되어 나에게 다가올 또 다른 기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현재(present)가 선물(present)이라는 말도 있듯이 현재, 지금, 오늘이 기적이 일어나는 선물이다. 내가 현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인생 한방, 인생 역전을 꿈꾸지는 말자. 기적은 한 방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매 순간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내가 무엇을 더 노력할 수 있는지, 도전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하자.
그러고 보면 브런치에서 글을 쓰면서 매 순간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간혹 마음속에서 그런 욕심이 들곤 했다. 글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한방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쓰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았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고 스스로에게 힐링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졸작을 읽어 주는 분들이 있고, 때로는 정말 도움이 되었다는 피드백을 받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 후로는 단순하게 꾸준히 글을 써서 내 생각을 정리하고 비슷한 고민과 경험이 있는 구독자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이렇게 순간순간을 감사하며 글을 썼을 때 놀랍게도 작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퍼블리(publy.co)에서 콘텐츠 저자 제안을 받아 이번 달 중순에 첫 글이 발행된다. 전자책 플랫폼에서도 30회 발행 후 출간을 전제로 매주 발행하고 있다. 이것들이 기적인 것은 나의 가장 큰 바람인 '내 글이 널리 읽히는 것'이 이뤄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것은 큰 힘이 있다. 감사하게 되면 게을러지지 않는다. 감사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감사해보면 좋겠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위한 무언가를 하게 될 것이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게 되면 그 상황을 기반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될 것이다. 감사와 기적은 늘 붙어 다닌다.
우리는 모두 기적 가운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것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내가 어떻게 내가 되었을까? 작은 순간순간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기적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있다. 나에게 펼쳐진 기적에 감사하고, 내일의 기적을 위해 오늘의 순간에 충실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