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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k Aug 07. 2020

'나 때는 말이지'는 싫지만 '엄마는 말이지'는 좋다

엄마 덕분에

마크님은 어떤 사람이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살아온 길을 이야기할 때 자주 받는 질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너무 단순한 표현이라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이 늘 따라붙곤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 지에 대해 표현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만큼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그리고 아직도 진행 중인 나의 모습을 찾아가기까지의 여정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가 있는 것은 힘들더라도 글로 표현하려고 노력해보라는 어느 작사가의 조언이 떠올랐다. 정의하기 어려운 내 인생을 한 문장에 담고자 노력한 끝에 나는 내 인생을 '엄마는 말이지... 를 통해 거둔 작은 성공으로 패배의식을 극복한 인생'이라고 표현해보았다.  


패배의식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도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나 몰래 주위에 자식 자랑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름 성공적으로 들어간 대학에서 첫 패배의 쓴잔을 맛봤다. 학부 시절 평점은 4.5 만점에 3.05. 3점대 학점은 교양과목 학점이 잘 나왔기에 가능했지, 전공과목의 평점은 한참 더 낮았다. 전공과목 중에 A학점은 딱 한 과목이었다. 전체 평점 4.0 이상이 많은 학점 인플레 시대에서 나는 후배들에게 '내 학점은 3점대'라고만 말한다.


내 대학시절은 철저한 실패였다. 군대를 포함해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공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다른 도피처를 찾았다. 연애, 운동, 만화, 글쓰기, 게임, 군대까지, 하지만 도피처는 도피처일 뿐 안식처가 되진 못했다. 모든 시기에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면, 나머지는 모두 모래 위에 성 쌓기일 뿐이다. 내 대학시절도 그러했다. 전공에 대한 두려움을 졸업할 때까지 극복하지 못했고, 여러 도피처를 찾아도 마음이 늘 불안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서 내 마음속엔 나도 모르게 '패배의식'이라는 녀석이 자리 잡았다.


도피처는 도피처일 뿐 안식처가 되진 못했다


돌이켜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목표가 없어도 성실하게만 살면 결과가 따라왔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대학시절 나는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살았다. 대부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위를 돌아보니 나만 목표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었다. 인생의 방향을 잃은 나는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괴로워하는 이상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졸업했다. 그리고 나에게 패배의식을 가져다준 전공을 버리고, 도피처 중에 하나였던 글쓰기를 살려 첫 회사에서 글을 쓰는 일을 시작했다. 대학도 졸업했고, 전공과도 상관없는 일을 시작했지만, 20대 초반 나를 지배했던 패배의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20대 청년인 내가 꿈을 갖지 못하고, 지극히 소시민적인 생각만 하도록 가둬버렸다.  


희망의 시작, 결혼


첫 회사에 출근한 지 다섯 달이 채 안 지났을 때 나는 어릴 때 교회 친구와 결혼했다. 결혼은 내 삶에 기쁨과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내 패배의식의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첫 단추가 되었다. 아내는 내가 고민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멀리 내다보면서 목표를 세우고 준비하도록 응원했다.


첫 회사에는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직원들이 미국 MBA에 합격하면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아직 지원 자격이 없는 신입사원이었지만 아내는 내게 4년 정도 기간을 두고 도전해보도록 권했다. 마침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전략이나 기획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때여서 우선 MBA 과정을 지원하는데 필수 시험인 GMAT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쯤 내게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회사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야 지원 자격이 생기기 때문에 회사 업무도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1년이 넘어가다 보니 어느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고, 마음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패배의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난 슬럼프에 빠졌다.


엄마는 말이지...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통화하다 MBA 지원 준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 날 어째서인지 엄마는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단어를 꺼내셨다. 바로 '패배주의'였다.


그전까지 아무도 나한테 '패배의식'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 '패배주의'가 있었지만 단지 존재했을 뿐 누구도 그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나도 내게 패배주의가 있단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그 단어를 꺼냈다. 어떻게 보면 엄마는 내 실패한 대학생활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는데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겉도는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속을 얼마나 많이 썩였는지 때론 몸져누우실 정도로 불효를 많이 했다. 본인의 상처도 컸을 텐데 엄마는 자신의 상처보다 내 마음에 배긴 패배의식이라는 짓무른 상처가 계속 신경 쓰였나 보다.


"엄마는 말이지... 이번에 네가 준비하는 것이 잘 되어서 작은 성공을 했으면 좋겠어. 그것을 통해서 네가 대학시절에 갖게 된 패배의식을 극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왕 시작한 거, 꼭 일이 되게 노력해보자."


엄마는 말이지...로 시작했던 엄마의 말은 내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렸지만, 나는 그 사람이 엄마여서 감사했다. 엄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고집이 셌던 나도 엄마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내 안의 패배의식과 마주했다. 그리고 이번에 작은 성공을 해서 꼭 이겨야겠다 다짐했다. 그날부터 시험 준비하는 나의 모드가 달라졌다. 퇴근 후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이 있는 집을 뒤로하고 바로 모교 도서관으로 갔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의 희생을 배수의 진으로 하고 열공 모드에 돌입했다. 학부 시절 그렇게도 멀리했던 도서관을, 졸업하고 나서야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는 아이러니라니...

학부 시절 그렇게도 멀리했던 도서관을, 졸업하고 나서야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는 아이러니

고비도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오면서 MBA 지원 프로그램을 잠정 중단된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일본 정부 장학생 프로그램으로 일본에서 MBA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회사에서도 일본 정부가 일체 비용을 부담하니 합격만 한다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2009년 8월까지 MBA 지원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내 마지막 GMAT 시험도 같은 달에 있었다. 시험을 마치면 바로 점수가 뜨는 잔인한 시험. 지원을 위해 필요한 최소 점수는 6XX점이었다. 나는 시험을 다 치른 후 마지막 컴퓨터 화면에 뜨는 점수를 차마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손으로 우선 가리고 뒷자리부터 차례로 봤다. X, X, 마지막 숫자는 6이었다. 내 점수는 최소 지원 점수인 6XX점이었다.


기적과 같이 지원에 필요한 최소 점수를 획득한 나는 면접에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때까지 나는 외국인들과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엄마의 조언처럼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선 전략이 필요했다. 내 전략은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완벽하게 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면접 날, 면접관은 내가 예상한 질문만을 정확히 물어봤고, 나는 준비한 대답을 능숙하게 해 나갔다. 면접관이었던 교수님은 '영어 커뮤니케이션은 전혀 문제가 없네요! 시험에서 점수가 낮은 파트가 있던데 합격하게 되면 그 부분을 보강해서 오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난 당당히 합격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후 처음으로 성공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안녕, 패배의식


엄마의 말대로 작은 성공이었지만 패배의식을 날려 버리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이 한 번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고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엄마는 말이지'는 엄마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엄마가 나를 오래 관찰하고 생각하고 고심한 끝에 하는 보석처럼 빛나는 조언이다. 10년이 흘렀다. 내 안에 있던 패배의식이란 녀석은 어디서 무엇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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