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음악이란
음악이, 노래가 갖는 힘은 성별, 국적, 나이, 피부색, 직업의 구분과 관계없이 절대적이다. 이 대전제를 건드릴 생각은 없지만, 출근하고 성실히 일하고 퇴근하는 직장인에게 음악은 또 다른 의미의 힘을 주는 것 같다. 직장을 다니며 듣는 음악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출근할 때 듣는 노래와 퇴근할 때 듣는 노래는 대개 다르다. 같은 퇴근도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불 끄고 야근 택시에 몸을 맡기며 듣는 노래와 상사에게 혼이 빠질 만큼 깨지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다잡고 퇴근 버스에서 창 밖을 보며 듣는 노래는 다르다. 집에서도 마음에 여유가 없는 주중에 듣는 노래와 부담 없는 주말에 듣는 노래가 다르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몇몇 노래는 많은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 오롯이 남기도 한다.
2016년 1월, 사랑하는 엄마가 웬일로 아들에게 전화했다. 전날 가슴 쪽에 큰 멍울이 잡혀 불길한 예감에 다니던 병원에 갔더니 큰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하셨다. 주말이 지나고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정밀 검사날, 회사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오후 늦게 걸려온 엄마 전화를 회사 탕비실에 들어가 받았다. 유방암이었다. 음... 뭐랄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조용히 울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로 수술 날짜가 잡혔고 수술 날 엄마와 아빠는 날 오지 못하게 하셨다. 대신 수술 다 끝나고 회복하면 오라고 하셨다. 그날 회사가 있는 충정로에서 27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종로5가를 지날 때였다. 이어폰에선 김필 x 김창완이 부른 '청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아직 엄마와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내 눈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는 눈물'은 처음이었다. 흐느낌도 없이 그냥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무 슬퍼 창피한 줄도 몰랐다. 굳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집에 왔더니 아내는 '그러게 왜 청춘을 들어가지고'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줬다. 다행히 엄마는 수술을 잘 마쳤고, 임파선에 전이되지 않았고, 여러 차례 항암을 잘 견디셨다. 지금은 만 4년 넘게 재발 없이 추적 검사를 받고 계신다. 이후 '청춘'을 들을 때마다 난 2016년 1월을 떠올린다.
우리가 특정 노래를 처음 접하는 경로는 다양하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가수라면 앨범 발표 때 접할 것이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가수가 선곡한 곡 중에서 소위 말하는 '띵곡'을 만나기도 한다. 출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곡이 인생곡이 되기도 하고, 요즘은 드라마 OST에도 좋은 곡들이 많이 만난다.
음악을 찾아서 듣기도 하지만 다양한 음악 프로그램을 즐겨 보기도 한다. 음악 프로그램의 장점은 좋은 음악을 큐레이션 해준다는 것이다. 좋은 밥상을 차려주면 그걸 맛있게 먹고 소화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다. 음악 프로그램의 형식도 다양하다. 유희열의 스케치북과 같은 뮤직 토크쇼, 미스터 트롯과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 슈가맨처럼 추억의 가수를 소환하는 프로그램,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비긴어게인과 같은 버스킹 형식의 프로그램 등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힐링이 되는 프로그램은 '비긴어게인'이다. 그 이유는 선곡 리스트의 곡 하나하나가 '선물'과 같기 때문이다. 최근 종영된 비긴어게인 코리아 편에는 이소라, 헨리, 수현, 하림, 적재, 크러쉬, 정승환, 이하이, 소향이 출연해서 매주 반짝반짝 빛나는 음악을 선사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특별히 한국에서 촬영한 이번 코리아 편은 몸도 마음도 답답했던 직장 생활에 그 어느 시즌보다 큰 위로가 되었고, 또 한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고마운 프로그램이었다. 직장인으로서 내게 많은 위로를 주고 생각에 잠들게 한 곡들을 꼽아봤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 비긴어게인의 '비긴' (링크)
코로나 19로 인해 처음으로 해외가 아닌 한국에서 진행된 이번 시즌의 시작은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였다. 자연을 무대로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쓴 오케스트라가 거리를 두고 연주했다. 하지만 노래 제목처럼 바람이 느껴지는 음색과 자연 배경이 주는 청량감만으로 힐링을 준 비긴어게인의 '비긴'이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다. 내 직장 생활 역시 불확실성의 연속. 어디서 불똥이 튀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지쳐갔다. 나에게 또 우리에겐 이런 노래가 필요했다.
이소라 x 정승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 10회 중에 최애곡 (링크)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에서 가장 사랑하는 노래. 더 잘 부른 노래들도 있고, 더 감탄했던 노래도 있었지만, 감성을 가장 흔들어 놓은 곡이다. BEST 댓글도 인상적이었는데, '정승환은 슬프고, 이소라는 아프다'였다. 사실 코로나 19 여파에 묻혀서 그렇지 올해 힘든 일이 많았다. 직장에서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고, 인생 2막을 계획했던 것도 틀어졌고, 첫째와도 부딪히는 일이 잦아지고, 몸도 아픈 곳이 많아졌다. 나만 그랬을까? 모두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위로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내게 이 노래는 반창고와 같았다.
헨리 'Youngblood' - 사랑스러운 천재 (링크)
헨리만의 독보적인 영역이 있다. 루프 스테이션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은 일부분일 뿐, 노력하는 천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실력파다. 정말 특이한 건 이 천재를 바라보는데 기분이 좋다는 거다. 사람들은 대개 천재를 보면 기분이 꼭 유쾌하진 않다. 직장에서도 그렇다. 타고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하는 이들 주변엔 늘 시기 질투가 가득했다. 첫 회사 영업부서에 회사를 상대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혁신적인 의견을 개진하던 선배가 있었다. 후배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동기들과 상사들 눈에는 불편했던 거 같다. 영업부서에 있다 황당하게 계열사 공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더 이상 천재의 모습을 꺼내지 않았다. 임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회사든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올라가는 천재형 임원은 누구와 점심을 먹는지까지 견제를 받는다. 그런데 헨리는 다르다. 기분이 좋아지는 천재다. 왜 그럴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론, 겸손하고 솔직하고 힘든 과정을 거친 천재이기 때문이다.
수현 'Reality' - 청아함 그 자체 (링크)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단어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수현의 Reality는 '청아함'이다.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아! 청아함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생각했다. 사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생각이나 말이나 글의 표현 범위가 제한적이게 된다. 내 나름의 극복 방법은 노래를 듣는 것. 노래 가사와 노래의 감성이 사고와 표현의 범위를 무한대로 이끌어낸다.
소향 'I will always love you' - 가끔은 '와~'하고 감탄을 지어보자 (링크)
가장 사랑했던 노래는 이소라의 곡이었지만, 음악 자체만으로는 가장 완벽했던 노래. 얼마나 대단했으면 BEST 댓글이 '교수님이 제자들 데리고 야외 수업하시는 것 같다'였을 정도. 나 역시 교회를 다니는 신자로서 CCM 가수인 소향을 좋아하지만, 대중적으로는 호불호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가수'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을 때도 너무 노래를 지르기만 하는 돌고래 창법이라고 깎아내리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소향은 강약을 완벽하게 조절하는 무결점의 가수가 되었다. 그가 부를 때 옆의 동료 가수들의 표정이 점점 관객들의 표정이 되어가는 걸 보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직장에도 이런 분이 있다. 본인이 몸을 담고 있는 분야에서 무결점에 가까운 그런 분. 이런 분이 내 옆에 있다면 그건 축복이고, 무조건 곁에 머물러야 한다.
수현 '일과 이분의 일' - 젊음 (링크)
비긴어게인 홈페이지의 갤러리에 들어가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찍은 포스터가 있다. 이번 코리아 편에서 가장 버스킹 다웠던 노래. 내가 부러웠던 건 젊음의 싱그러움이었다. 직장에서도 젊은 직원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뭔가가 있다. 나이가 다는 아니지만 가끔은 나와 열심히 업무 얘기하는 직원이 스물여섯이라는 사실을 알면 세상 그 누구보다 부럽다.
정승환 '사랑에 빠지고 싶다' - 초심 (링크)
사실 이 노래는 이번 시즌 모든 노래 중에서 원래부터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케이팝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역대 최고 영상으로 꼽히는 정승환의 등장을 알리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 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정승환에게 감사하고 또 놀라는 것은 그가 초심을 잃지 않고 묵묵히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새해가 될 때마다, 또 직장을 옮길 때마다, 내가 가졌던 초심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할 만큼 아마추어 시절의 감성 그대로 담백하게 불러서 고마웠던 곡.
비긴어게인 코리아 팀 '길' - 크러쉬의 눈물 (링크)
사실 크러쉬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부른 노래가 되어 버렸지만, 크러쉬의 눈물로 가장 화제가 된 곡. 사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 god의 '길'은 가사가 좋기로 익히 알려진 곡이다. 이번엔 특히 노래를 부르기 전에 헨리가 말한 사연과 노래 가사, 그리고 크러쉬의 눈물까지 맞물려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가사에 빠져 들었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인터뷰에서 적재도, 수현도, 정승환도 크러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직장인이라고 다를까? 저 세 가지 질문 중 어느 하나도 속 시원히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에 god의 '길'이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 않나 싶다.
수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 수현의 눈물 (링크)
본인이 '정말 제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사랑하는 노래예요'라고 소개했던 곡. 나 역시 너무나 좋아하는 노래. 이번 시즌 마지막 솔로곡이었던 이 노래가 끝나자 수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수현아 왜 울어?'라고 묻는 헨리에게, 수현은 '저는 항상 비긴어게인이 끝나고 나면 그리움과 보고 싶은 마음과 허무함과 공허함에 대개 그런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저의 미래가 그려지면서... 그래서 언니 오빠들도 너무 보고 싶을 것 같고... 비긴어게인이 끝나고 나면 여러분을 만날 기회가 많이 없어지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단어는 공허함이었다. 3달 가까이 이렇게 좋은 노래를 불러줬는데 정작 본인은 이후에 공허함의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라니. 생각해보면 인생도 직장생활도 그렇다. 어느 기간 동안 의미 있는 무언가를 이뤄도 그것이 지나면 공허하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무언가를 찾는 건지 모르겠다. 결과를 통해 얻는 기쁨보다 과정 속에서 얻는 행복이 더 크다는 걸 수많은 경험 속에서 체득했기 때문인지도.
비긴어게인은 끝났다. '이젠 어떤 노래를 들어야 하나?' 싶다. 당분간은 다시 듣기로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노래의 진정한 힘은 다시 듣기가 가능하다는 게 아닐까?
모든 사진의 출처는 비긴어게인 코리아 홈페이지(http://tv.jtbc.joins.com/beginagainkorea)의 포토갤러리 게시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