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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의 축제 Mar 29. 2020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서평(「재희」/창비)

#대도시의_사랑법

너무 재미있는데?



박상영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 된, 「재희」를 채 열 페이지도 넘기지 않은 시점,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심지어 읽으며 마음에든 부분이 너무 많아, 그 얇은 두께에 계속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였다. 


(* 출판사 창작과 비평사에서 진행하는, 박상영의 신작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 사전 서평단으로 선정 되어 작성되는 글임을 밝힙니다.)



# 경계선이 주는 카타르시스


소문은 사실인데 재희한테 들이대다 대차게 까인 철구, 네가 할 소린 아니지. (p. 6)
얼굴과 마음이 골고루 역겨운 새끼 (p. 15)
나도 모르게, 넌 이 와중에 디올 립스틱 사 바를 정신은 있니? 해버렸다. (p. 28)
그래 알겠어, 재희야. 다 알겠는데 그래도 자궁 모형은 아니잖아.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p. 36)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재희」 中


읽으며 제일 많이 마음이 갔던 지점들은 전부 현실과 픽션의 적절한 줄다리기가 있는 부분이었다. 마치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미묘한 기분이, 박상영 소설만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와 ‘재희’의 공통분모로 자리한 익명의 ‘연령 미상 남자들’ 그리고 그의 속마음들을 비춘 대사들이 좋았다. 적당히 위트가 있으면서도 콩트의 본분을 벗어나지 않은 균형 감각이 있었고, 그 특유의 멘솔 같은 시원함이 그의 글에는 있었다. 

 

<논픽션>은 2019.05.16.개봉작(한국 기준)으로, “‘종이책’인지 ‘E북’인지 변화의 상황에 놓인 파리지엥들과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모를 이들의 쿨한 관계를 유쾌하게 그린” 영화이다. 그 중에서 빈센트 맥케인이 맡은 ‘레오나르’ 캐릭터는 픽션과 리얼리티가 공존하는(아슬아슬한 경계선) 소설을 쓰는 작가로 등장한다.

 


# 블루베리 그리고 말보로


재희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벌크 사이즈의 미국산 냉동 블루베리를 사다 냉동실에 넣어놓곤 했다. 나는 보답처럼 재희가 좋아하는 발보로 레드를 사서 냉동실 블루베리의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p. 20)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p. 54)
그 형은 다 좋은데 여자 보는 눈 하나가 없네, 말했다. 재희는 그치? 하고 대답했다. (p. 56)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재희」 中


벌크 사이즈의 냉동 블루베리와 말보로 레드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그것들은 마치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함께 산다는 것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사소한 공기를 공유하고, 햇빛을 공유하고,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결혼은 단지 그 공유를 제도적으로 묶는, 그러니까 서로 다른 성별을 지니고 있는 이성간의 일상적 공유를 묶어주는 제도인 것이다. 그 매듭이 안전한지, 불안전한 것인지는 아직 나에게도 미지수이다.  


그 미지수의 경계선을 박상영은 아주 잘 그려내고 있다. ‘나’와 ‘재희’에게 있어서 서로는 단지 일상을 공유하는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가족’의 사회적인 틀을 이루지 않고 있을 뿐. 이들은 서로에게 충분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던 것이다. 가장 힘들 때 함께 해주는 대상을,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아닌, 안식처로 불리기에 가장 적합하고 마땅하다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재희’의 결혼식에서, 이유모를 감정이 솟구치게 되는 것을 경험한 것 아닐까. 안식처를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찾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은 연약해 질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냉동실에 블루베리를, 내 호흡에 맞춰 사다줄 사람이 없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연령 미상의 남자들을 함께 공유하고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속옷까지 모두 갖춰 입고 침대에 누워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 비어버린 것이 너무나 많은 일상은, 우리를 충분히 무너지게 만들기에 족하다.  


‘나’와 ‘K3’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은 사랑에 관한 오글거리는 경구들이 새롭게 오지 않는다는 것. 올 수 없다는 것. 우발적 혹은 자발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비어버린 관계는, 언제나 “보라색 얼음 조각 하나만이 툭 떨어(p. 67)”지게 만들 뿐이다. 더 이상은 손가락이 보라색이 될 수 없어. 



# 현실은 언제나


순진한 스무 살짜리들이나 신경 쓸 것 같은 소문을 잘도 떠들어댔고 그 얘기는 반 정도만 맞았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기 마련이었다.) (pp. 9-10)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 모르지 나도. (p. 44)
니 인생에 서울대는 없다며. / 인생이 뜻대로 되면 우리가 이러고 살겠니? (p. 47)
그런데 그 때, 나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 배신감. (p. 50)
나는 재희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p. 52)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재희」 中


‘나’는 자신이 아웃팅 당했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 아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재희가 저버렸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나의 비밀이 재희와 그 남자의 관계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p. 51)”에 있다. 


어떤 관계에서건, 불특정 다수는 또 다른 불특정 다수를 ‘도구’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전혀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구적인 사용이 만연한 사회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바로 그 만연한 오류를 믿었던 ‘재희’에게서 당하자, ‘나’는 이제까지와 다른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믿었기에, 어느 누구도 아닌 재희니까,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둘만이 공유하는 일상을, 다른 이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난도질당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 기분은 ‘배신감’이라는 단어에 담기에도 벅찰 정도이다. 그 어느 그릇으로도 그 감정은 다 담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분노라는 것의 성질이 그런 것이 아닐까. 본인도 발화 지점을 정확하게 잘 모르는 것이 바로 분노다. 마치 산불과도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진화 하려고 해도, 바람이 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불어오는 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애먹는 것이 바로 분노이다. 때로는 더 거세지기도 하고, 때로는 더디기도 하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다 타길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 내면에 있는, (나도 몰랐던) 자아들의 출현으로 또 공고해지고는 한다. 나는 그것을 칼 구스타프 융이 말한 “성인 내면에 있는 아이”라 부르고자 한다. 즉, ‘내면의 아이’는 늘 우리의 내면에서 “영원한 아이가, 말하자면 언제나 형성되는 과정에 있고 절대로 완성되지 않는” 존재이기에, 늘 지금의 ‘나’로부터 보살핌을 받기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보살핌이 모두 필요한 존재이다.  


(* 출처: 칼 구스파트 융, 김세영·정명진 역, 『인격은 어떻게 발달하는가』, 도서출판 부글북스, 2015, p. 226.) 


박상영의 신작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 된, 「재희」를 통해서,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 받고자 하는 우리 안에 자리한 ‘작은 아이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우리는 모두에게 어린 아이이고, 또 어린 아이였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어린 아이인. 보살핌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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