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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 방구석 주부 May 24. 2023

마케도니아 식빵 누나의 집요함과 대담함

D+282 (may 10th 2023) (2)

앞 글에서처럼, 아이의 미국 초등학교 어학 수업에서 가족을 초청해 함께 포트락 파티를 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같은 시기 미국에 처음 온 북마케도니아 출신 동급생 남사친 T와, 그의 엄마이자 아내와 내가 식빵 누나라 부르는 당찬 유럽 여성 V도 같이 모임에 참석했다. 농구선수 출신인 남편 K가 모 아카데미에서 저녁에 농구 코치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우리 차를 타고 함께 모임으로 향했다. 


최근 몇 주 동안 V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 딸이 그 집에 놀러 가거나 T가 우리 집으로 놀러 와서 자주 보고, 주말에 아이들이 함께 놀 수 있도록 플레이 데이트도 꽤 했는데, V는 업무가 갑자기 바빠져서 정신이 없었고, 우리 딸은 방과 후 클래스 때문에 하교를 늦게 해서 주중에 같이 만나 놀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이번 모임에서 모처럼 V와 각 잡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긴 거다. 매번 느끼지만 우리와 완전 다른 문화권인 유럽에서 온 그녀는, 겉모습도 많이 다르지만 사고방식도 많이 다르다. 그녀가 오늘 들려준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 그 다른 관점이 일을 어떻게 다르게 처리해 나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녀에게서 들은 지난 몇 주간의 일들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녀의 둘째 아이가 대학교에서 다시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새로 이사 갈 단지의 임대 사무실 직원에게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기어코 얻어냈다는 것이었다.


둘째 아들의 1부 리그 대학교 장학생 입학!

K와 V네 집에는 아이 셋이 있는데, 그중 둘째의 학교 문제 때문에 둘의 고민이 많았다. 둘째는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아빠를 따라 농구를 했는데, 미국에 이민 오면서 농구 장학생이 될 수 있는 학교를 백방으로 찾아다니고 있었다. 원래 다니기로 했던 학교는 말을 바꿔 장학생이 어렵다고 알려 왔는데, (전에 글을 쓴 시기엔 이 학교 장학생이란 말을 들었었다) V네 가족이 미국에 이민 온 시기가 대학 입시 전형이나 편입이 모두 끝난 뒤여서 바로 적당한 학교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 학기에라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주변에 있는 학교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테스트를 봤는데, 실력은 인정받으면서도 장학금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K와 V가 다니는 회사의 임원과 사적인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 임원이 모 1부 리그 대학 농구 헤드 코치와 엄청 절친이라면서 그 학교나 다른 곳에 기회가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V는 미국 안이기만 하면 어디를 가도 상관없으니 꼭 좀 부탁한다고 했단다.


사실 그다음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임원이 헤드 코치를 만나 대화를 하고, 코치는 학교에 빈자리 나 장학 펀드가 남은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또 테스트를 받고, 숙고 끝에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사실 숨이 막혔을 거다. 그런데 그녀는 그 시간을 그냥 기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그 임원을 집요하게 푸시해서 그 헤드 코치를 만나게 하고, 만난 후엔 또 계속 임원을 푸시해서 그 헤드 코치가 빨리 알아보고, 결정하게 하고. 이래서 결국 1부 리그 대학에 아이가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단다. (미국 대학 농구 특기생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라스트 찬스 대학: 바스켓볼’을 보면 이해가 빠르지만… 뭘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내와 나는 흠칫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의 임원을 그렇게 푸시한다고? 아이의 대학교 장학생 기회를 놓고? 아니, 그걸 떠나서 그 임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자기나 남편의 회사 생활이 불편해질 수도 있는데? 하지만 V는 기다리기만 하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믿고, 엄청난 대담함과 집요함으로, 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그 임원을 매일매일 푸시했고, 아들의 1부 대학교 장학생 자리를 얻어냈다! 아들의 목표가 2부 리그 학교 편입학이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대담함과 집요함으로 아들을 1부 리그 대학교 입성시키다니… 나와 아내도 축하해 줬다.


아파트 임대 사무실에서 방 세. 개 집을 얻어내다!

V와 K 가정은 아들의 대학 편입학 결정과 함께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둘의 회사와 집이 너무 멀기도 했고, (차로 30분이나(?) 걸린다) 이제 아들의 학교도 회사 옆이어서 굳이 이렇게 멀리 살 이유가 없어졌다고 한다. 우리로선 가까운 친구가 멀어지게 되어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는 V와 K에겐 좋은 일이었고, 막둥이 T도 혼자 있을 시간이 줄어드니 좋은 일이다.


V네는 그동안 우리랑 같은 크기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아마 꽤나 고역이었을 거다. 방 두 개에 화장실 두 개 아파트인데, V네 식구는 총 다섯 명, 첫째 딸은 같이 지내고 있지 않지만 주말마다 오는 데다, 성인이 세 명, 초등학교 고학년 한 명이니, 집이 비좁다. 거기에 손님도 자주 오는 편이고, 친척이 한 달씩 머물다 가기도 한다! 


그래서 방 세 개짜리를 원하고 있었는데, 마침 회사 근처 아파트 단지에 방 세 개짜리가 있어 보러 갔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임대 사무실에서 방 세 개 아파트가 다 나가고 없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도 V의 대범함과 추진력으로 임대 사무실 직원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직원의 요지는 방 두 개를 보는 줄 알고 미리 그 집을 빼 두었으며, 가격도 좋은 가격에 줄 수 있다, 지금 너한테 줄 수 있는 방 세 개짜리는 없다, 아쉽게 되었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V가, 그럼 가겠다, 했더니 계속 잡더라는 거다. 아, 이거 뭔가 있구나 싶었던 V는 딴 얘기 하지 말고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줄 수 있는지만 이야기해라, 없다면 일단 갈 테니, 방 세 개짜리를 줄 수 있으면 그때 연락 줘라, 자기는 방 두 개짜리는 필요 없다, 하고는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이 또한 그녀의 집요함과 대담함이었다. 아마도 직원 입장에서는 임대 기간의 차이가 있어 더 집을 비워두지 않아도 되는 세입자를 받고 싶어 그 집을 주지 않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집요함과 대담함에 결국 불과 몇 분만에 직원에게서 연락이 와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보여줬고, 무사히 계약을 잘 마쳤다고 한다. 


나와 아내에게는 V가 하는 말들은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무사의 무용담과도 같았다. 전에 미국 영주권을 받을 때는 서류가 빨리 안 나와서 미국 국토 안보부에 전화한 적도 있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미국의 비자나 영주권을 받는 입장에선 개인은 완전 ‘을’이라 뭐 조그만 거라도 책잡힐 것이 있을까 벌벌 기는 게 나한텐 더 자연스럽다) 나와 아내는 그저 입을 딱 벌리고 ‘no way!’ ‘Oh my god!’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처음에 말했던 미국에 대한 관점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나와 아내가 미국에 오고 나서 느낀 부분 중에 하나는 미국엔 법과  원칙이 정해져 있지만, 그 법과 원칙이 가지는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원칙을 어기는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법과 원칙이 있으면 그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원칙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 원칙에 의해 본래 목적이 훼손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미국에 왔을 때 법과 원칙이 이렇게 쉽게 바뀌거나 우회(?)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떨 때는 원칙대로 하면 절대 안 되는 일이 이상한 방법으로 해결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원칙대로 하면 벌써 해결되었어야 하는 일들이 절대 안 되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처럼 ‘원칙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라고 배운 사람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적응하기도 힘들고 예측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나는 통상적으로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법과 원칙이 있으면 그것에 맞춰서만 일을 진행하려고 한다. 그게 내겐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V는 미국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놈의 미국 사람들은 도대체 융통성이 없다는 것. 뭐 좀 해달라고 하면 원칙상 안된다는 말만 해서 화가 난다고 한다. 담당자가 기다리라고 한다고 해서 기다리기만 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다.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문화적 배경에서 그런 태도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V는 언제나 앞에 나서고 행동한다. 그래서 쟁취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미국은 한국보다 더 융통성이 있으니 더 요구해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미국이 유럽보다 더 원리원칙적이니 담당자의 말을 들으면 돌아설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행동한다. 아무래도 뇌리에 새겨지고 몸에 밴 사고/행동 습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녀의 이야기는 굉장히 역동적인 한 편의 무협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워낙 압도되어 그녀 가족이 멀어진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건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가 되어서야였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라고 V 만큼의 간절함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녀와 같이 할 수 있었을까? 임원이 말할 테니 기다리라고 하면 그저 마음만 졸이면서 기다리지 않았을까? 방 세 개짜리 아파트가 없다고 하면 그저 없다는 말에 뒤돌아서지 않았을까? 때로는 이런 집요함과 대담함이 필요하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이럴 수는 없겠지만, 정말 간절한 일이라면 이 정도 집요함과 대담함은 어쩌면 필수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들을 1부 리그 대학 장학금을 받게 했으니까. 


Photo by Ruslan Rusl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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