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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 방구석 주부 Oct 05. 2022

루틴과 권태의 상관관계

D+60 (sep 30th 2022)

나는 루틴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이다. 성격이 산만하고 잘 집중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루틴을 정하고 그대로 생활하지 않으면 쉬이 나태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그래서 크던 작던 변화를 싫어하는 편이고, 변화가 필요할 때는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루틴을 설계하고 일주일 안에 그 루틴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이러한 루틴이 생산성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과 도시락, 커피 준비부터 씻고 옷 입고 준비해 나가는 시간까지. 철저하게 루틴에 의거해서 움직였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아침에 이메일 검토와 스케줄 관리, 업무의 순서까지 루틴대로 업무를 시작했고, 점심시간마저도 밥 먹고, 책상 스트레칭, 산책까지, 루틴, 루틴, 또 루틴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금방 지겨워진다고 계속 새로운 것들을 추구해 보라고 권하지만, 난 변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반복의 권태보단 변화의 두려움이 큰 편이다.


미국 이주라는 큰 변화를 겪고, 약 한 달 동안 가족 모두 정착이라는 큰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는 다른 누구보다 더 빠른 정착에 집착했던 것 같다. 무의식의 이유는 단연 빨리 루틴을 정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하루의 일과를 보낸다는 것은 나에게는 꽤나 큰 고통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나에게 일어날 일들과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예측 가능하길 원했고, 그런 이유로 하루빨리 루틴을 고정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은 기간만에 (이 매거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정착 과제들을 모두 마무리했고, 아이와 아내가 학교에 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나만의 루틴을 짜서 그 일정대로 하루를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를 학교 버스에 태워 보내고, 간단히 청소와 빨래를 마친 뒤 아파트 짐에 가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글을 쓰고 유튜브 영상을 만들다가, 아이와 아내를 픽업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해서 밥을 먹이고, 아이 숙제를 봐준 뒤 재우고 나면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되는 루틴이다.


미국에 오면서 개인적으로 가정을 돌보고 아이와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는 가정 주부로서의 역할 루틴 외에 개인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콘텐츠 크리에이터였다.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작가로서,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크리에이터로서 조금씩 노력해서 조금 먼 미래에는 가정 경제 활동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긴 시간은 아니지만 루틴으로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고, 영상을 찍고, 영상을 편집해 올리는 일을 조금씩 해 왔다. 원래 회사에서 하던 일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루틴으로 이 일들을 진행하면 왠지 회사 일처럼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루틴이 지속되어 각 태스크의 결과가 쌓이면 굉장한 뿌듯함으로 다가온다. 계속 기록을 쌓고 싶어 반복적인 행동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때까지 지속한 과거가 아까워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매일 짐에 가서 운동하는 루틴은 한 달 동안 빼먹지 않았고, 브런치(블로그) 글쓰기와 유튜브 동영상 제작 업로드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다. 회사 일처럼 칼 같이 마감을 지키면서 업로드하지는 못했지만, 회사 일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인간적이지 않아 보이잖아.


그런데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몇몇 브런치의 글들이 포털에 소개되면서 브런치 조회수는 눈에 띄게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카카오!) 하지만 나머지 콘텐츠들은 영 미미했다. 내 미국 생활의 날 것이 공개되는 것을 각오하고 만든 유튜브 영상은 영 반응이 없었다. (뭐, 물론 유튜브는 3년 인내가 기본이다) 내가 무슨 소셜 인플루언서는 아니라도, 콘텐츠 기획 전문가로서 내가 본격적으로 콘텐츠를 기획해 내놓으면 무조건 잘될 거라고 착각한 것은 아닌가 싶다. 루틴은 있고 반복은 있는데, 진전이 없었다.


또 한쪽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무너지자, 다른 일, 가정 주부로서의 역할도 조금씩 균열이 찾아왔다. 괜히 밥도 하기 싫고 운동도 가기 싫어졌다. 결국 오늘은 처음으로 평일 운동을 나가지 않았다. 유튜브 쇼츠 스와이프만 두 시간 한 것 같다. (왜 그래? 나만 그래 본 거 아니잖아)


한국에서는 한 번 루틴이 잡히면 그래도 6개월 이상은 아무런 권태 없이 유지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한 달 만에 지겨운 마음이 들었을까? 생각해 보니까, 한국에 있었을 때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진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회사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 일은 외부에서 결과를 강제하고, 그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진전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강제되는 결과가 없어서 진전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닐까? 똑같이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개인이 콘텐츠를 만들어 대중에 공개하는 것은 그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니까 보람을 가질 만한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콘텐츠가 전~혀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 미국을 올 때는 개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열심히 활동하면 짧은 시간 내에 푼돈이라도 만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다. 갈 길이 멀구나, 하는 걸 절실히 느낀다. 


벌써 미국에 온 지도 두 달이 지났고, 루틴대로 산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브런치는 다행히도 많은 독자들이 찾아주시는 매체가 되어 주었다. 처음 브런치에 발을 들인 지 거의 2년 만의 성과다. 홀로 이곳에 있으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강점은 꾸준한 루틴 하나뿐이다. 운동이든 콘텐츠 제작이든, 혹은 글쓰기이든 꾸준히 계속해 보려고 한다. 지금은 한 달 만에 권태가 찾아왔지만, 루틴이 날 꼭 붙잡아 주리라. 꾸준히 쌓이면 그게 곧 힘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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