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주일기

나의 로망, 미국 고등학교 풋볼 나잇

D+414 (Sep 22nd 2023) 로망실현

by jcobwhy

전에도 수도 없이 이야기했듯, 난 미국 하이틴 무비의 광팬이다. 클리셰 가득한 하이틴 무비를 보며 ‘내가 만약 미국 고등학교를 다녔으면 어땠을까?’ 하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한국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평범하고도 눈에 띄지 않는 그런 ‘노바디’로 살았을 것이 58,000% 확실하지만, 그래도 고교 농구팀이나 풋볼팀에서 운동하면서 인기 많은 학생은 혹시 되지 않았을까 터무니없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20대 후반 미국 대학원 유학을 할 때는 그런 나의 로망을 채워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종합대학이 아닌 아트 스쿨이어서 대학 스포츠가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았고, 캠퍼스도 따로 없어 캠퍼스의 낭만도 없었다. 어떤 면에선 한국 대학교보다도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그런 미국 하이틴 무비에 나오는 그림들을 로망으로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미국에 와서도 그런 로망은 그다지 채워주지 못했다. 아내의 학교는 공부만 주야장천 파는 전형적인 너드 학교다. 대학교 운동팀의 디비전이 내가 다니던 아트 스쿨보다도 낮다. 요지는 아내의 학교에서도 학교 운동팀을 응원하는 문화라든지 이런 것들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아이의 학교에서 고등학교 풋볼 경기 응원 안내 메일이 왔다. 미국은 하나의 학군에 하나의 공립 고등학교가 있고, 그 밑으로 피라미드식으로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구성돼 있다. 아이 초등학교 학군의 고등학교 풋볼 경기가 열리는데, ‘엘레멘터리 나잇’이라고 해서 초등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위한 응원 이벤트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아내와 나의 미국 고등학교 문화에 대한 로망과 갈망도 채우고, 딸아이도 미국 특유의 스포츠 응원 문화를 체험할 겸해서 함께 응원을 가기로 했다.


사실 처음에는 의구심이 많았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 봐왔던 미국 하이틴 영화는 거의 대부분 미국 고등학교의 풋볼팀과 치어리더팀, 그리고 그 주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 영화에서 그려지는 운동 경기와 주변의 분위기는 사실 한국 프로 스포츠의 열기를 뛰어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리가… 고작 고등학교 풋볼 경기일뿐인데. 대학 스포츠나 프로 스포츠가 인기 많은 거야 이해할 수 있지만, 고등학교 스포츠에 그 많은 인파와 열기라고? 그럴 리가 없다.


학창 시절, 나는 농구로 유명했던 중학교, 축구로 유명했던 고등학교를 나왔다. 가끔 시대회나 전국대회 때, 응원을 가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어린 시절 몇 번 없는 나들이에 들뜨는 경험이지만, 사실 응원의 열기는 형편없다. 관중이라곤 동원된 우리 학교와 상대 학교의 학생들 뿐이다. 남중 남고의 특성상 경기 후 패싸움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경험을 비추어 볼 때, 미국 하이틴 영화의 그런 열기 가득한 고등학교 풋볼 경기의 모습은 프로 스포츠를 흉내 낸 과장의 결과일 거라 생각했다. 그저 선수들의 학부모들과 동원된 학생들이 비슷한 느낌을 내주겠지 정도의 예상이랄까?


하지만 그런 예상과 나의 의구심은 도착도 하기 전에 모두 깨어져 버렸다!


일단 경기가 펼쳐지는 고등학교 주차장까지 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학교 이메일의 안내에 따라 경기 시작 한 시간 반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차량으로 주변은 엉망진창이었다. 학교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주변의 주차를 할 수 있을만한 땅은 모두 찼다. 30여 분을 돌아다닌 끝에 남의 집 앞에 겨우겨우 차를 대고 20분을 걸어서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드레스 코드(학교 공고 이메일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으라고 권고했다. 상대방을 white out 해 버리겠다나?)를 맞춘 수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인파는 거의 끝도 없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크지도 않은 이 작은 마을의 고등학교 풋볼 경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다니! 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모인 건가?


홈 경기장(사실 고등학교 주 운동장이다) 안은 더 어미어마했다. 사람들도 많을 뿐 아니라 모든 고등학교의 역량이 총동원된 듯했다. 학교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마칭 밴드, 중학교, 고등학교 1, 2진 치어리더까지, 그리고 지역 내 7개 초등학교의 학생들까지 총동원됐다. 수많은 행사들이 펼쳐졌는데, 이게 바로 앞에서 수차례 이야기했던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의 클리셰 장면 그 자체다! 특히 선수 입장 때 주장이 거대한 성조기를 들고 뒤어서 등장하는 장면은 정말 멋있었다. 우리 딸도 선수 입장 세리머니에 참여해서 같이 자리한 것도 의미가 컸다.


경기가 시작됐다. 사실 아메리칸 풋볼은 외국인 입장에선 그 룰을 이해하기 힘들다. 워낙 복잡한 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다른 나라에는 없는 낯선 게임이다. 그냥 땅따먹기 정도로만 이해하고 경기를 봐도 충분히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경기 말고도 볼거리가 넘. 많았다. 쉼 없이 연주되는 마칭 밴드의 각종 곡들, 열정 넘치는 치어리더들의 끊임없는 응원들, 그리고 이를 따라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고등학교 학생들. 오히려 할리우드 영화에서 톤다운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 모두가 열정적으로 응원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이게 내가 로망으로 가지고 있던 미국 고등학교의 모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마음은 조금 달랐다. 이 모습을 보면 엄청 설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흐뭇했다고 해야 할까? 이제 사십 줄에 들어서서일까? 고등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습들이 마치 자녀들을 보는 느낌이라서 너무 귀엽고 보기 좋았다.


그런데 슬슬 지쳐갔다. 경기의 승부야 사실 우리 입장에선 크게 의미가 없고, 이 늦은 시간(8~9시)까지 야외에 있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경기가 끝나고 자리를 뜨게 되면 정말 밖이 아수라장일 것 같았다. 그래서 하프타임에 자리를 떴다.

문화적 경험은 충분한 것 같았다.


그토록 체험 혹은 경험하고 싶었던 미국 고등학교 문화의 정수를 체험한 저녁이었다. 차가운 일자형 벤치에 앉아 거의 다 식어가는 피자를 먹어가며 순수한 고등학교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관중들과 치어리더들, 마칭 밴드 대원들. 바로 내가 영화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다. 체험은 이 정도면 되었다 싶다. 어차피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내가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미국 고등학교에 다닌다 하더라도, 그저 평범한 아시안 고등학생에 그쳤을 테니. 그래도 그저 영화와 내 망상 안에서만 존재했던 바로 그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이 큰 만족함을 주는 하루가 아니었나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23년 가을, 미국에서 코비드 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