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이유

실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 인생 최고의 실패였다

by 기록습관쟁이

저의 신발장에는 유독 깨끗한 운동화 한 켤레가 있습니다. 산 지 꽤 되었음에도 밑창은 닳지 않았고, 코 부분에 흙탕물 자국 하나 없습니다. 누군가는 저의 철저한 관리 습관을 칭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신발이 깨끗한 이유는 제가 험한 길을 피해서만 걸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돌이켜보면 제 인생도 이 운동화와 닮아 있습니다. 마흔을 넘긴 나이, 누군가는 무용담처럼 털어놓는 파산의 경험도, 처절한 낙방의 기억도 제겐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평균 이상의 성적을 유지했고, 큰 풍파 없이 가정을 일궜으며, 제 몫의 일들을 매끄럽게 처리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안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그게 유능함의 증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슴 한구석에 형체 없는 공허함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제 삶의 궤적이, 사실은 목적지도 꽃바람도 없는 황량한 고속도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CCTV 엔지니어로 일하며 저는 늘 완벽을 추구했습니다. 화면이 끊기지 않아야 하고, 녹화는 빈틈없어야 하며, 네트워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안정적이어야 했습니다. 현장에서의 실수는 곧 보안의 구멍을 의미하기에, 늘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직업적 습관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었습니다. 언제나 삶과 일정한 안전거리를 유지했습니다. 무언가 실패할 것 같은 냄새가 나면, 본능적으로 발을 뺐습니다. 전략적 후퇴 혹은 효율적인 선택이라는 근사한 포장지를 씌웠지만, 사실은 절벽 끝에 서는 공포를 견디지 못했을 뿐입니다.


2021년 가을부터 2년간, 평택의 삼성 반도체 현장에서 보냈던 시간도 그랬습니다. 거대한 먼지와 소음 속에서 함바식당 일을 하며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도 실패할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고 있었습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움직였고,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마음을 내주었습니다. 승패가 결정되기 직전에 "이쯤 하면 됐다"며 먼저 등을 돌리는 것. 그것이 제가 실패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지 않았던 비결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의 반대말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접 부딪혀보니 알 것 같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도전'이라는 동전의 앞뒷면일 뿐입니다. 동전을 던져야 앞면이 나오든 뒷면이 나오든 결과가 생기는데, 저는 동전 자체를 손바닥 안에 꼭 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전을 던지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지만, 얻을 것도 없습니다. 제가 누려온 평온은 승리 뒤의 휴식이 아니라,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하얀 공백이었습니다. 10살 된 아들이 서툰 솜씨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며 수없이 틀리고 지우는 모습을 볼 때, 혹은 곧 태어날 둘째를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아내의 얼굴을 볼 때, 저는 뒤늦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온몸으로 삶이라는 파도에 부딪히며 흉터를 만들고 있는데, 저는 젖지 않으려고 해변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흉터 없는 무릎은 유능함의 상징이 아니라, 한 번도 전력 질주해 보지 않았다는 게으른 증거였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저는 다시 한번 이 안전거리와 마주합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혹시라도 아무도 읽지 않을까 봐 느끼는 두려움이 자꾸만 펜을 멈추게 합니다. 예전의 저라면 '바쁘니까',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라며 세련되게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합니다. 하하..)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게 살기로 했습니다. 제 삶의 가장 큰 오점은 실패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실패를 선언합니다. "내가 유일하게 실패한 것은 바로 실패 한 번 안 해보고 살았던 지난날들이다!"이라고 말입니다.


이 선언은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삶이라는 경기장에 입장하겠다는 출사표입니다. 이제 제 신발에는 흙탕물이 묻을 것이고, 제 무릎에는 훈장 같은 굳은살이 박힐 것입니다. 매끈한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꽃바람 부는 거친 들판으로 걸음을 옮겨보려 합니다.


연재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대단한 성공 신화나 완벽한 삶의 지혜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안전거리를 허물고 삶에 투박하게 부딪히는 과정 자체를 기록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쓰다 만 소설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엉망진창이 된 프로젝트의 회고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이제 나에게 실패는 피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동전은 이미 던져졌습니다. 그것이 앞면이든 뒷면이든, 나는 기쁘게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니까요.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