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군가에게 어떤 환경입니까?
사건의 발단은 늘 그렇듯 선의였다. 현장은 긴박했고, 내 머릿속 알고리즘은 빛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이건 지금 바로 처리해야 해. 보고하고 승인받을 시간에 문제는 더 심각해질 거야. 내가 책임지고 가보자!'
결과는 완벽했다. 문제는 해결되었고, 효율은 극대화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현장의 영웅이라 칭하며 상사의 칭찬세례를 상상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칭찬이 아니라, 고막을 찢는 샤우팅이었다.
"야! 왜 보고 안 했어?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제발!"
순간 내 머릿속 영웅 서사는 와장창 깨져나갔다. 나의 올바른 결정은 상사의 눈엔 건방진 독단이었을 뿐이다. 억울했다. 하지만 내 의견은 에스프레소 기계에 들어간 원두마냥 곱게 갈려 묵살당했다. 그리고 이 잔혹한 루틴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안드레아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을 품고 패션 잡지사 런웨이에 입사한 그녀.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패션의 심오함이 아니라, 상사 미란다 프리슬리의 말도 안 되는 지시들이었다.
"쌍둥이 딸들이 볼 수 있게 아직 출간도 안 된 해리포터 미발매 원고를 구해와."
안드레아는 코웃음을 쳤을 거다. '이게 기사 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미란다의 세계에서 안드레아의 의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란다가 요구하는 건 '선조치'가 아니라 오직 '완벽한 복종'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겪는 괴리도 이와 비슷하다. 안드레아가 "이건 그냥 파란색 스웨터잖아요?"라고 한마디 했다가 "그건 그냥 파란색이 아니라 세룰리안블루야!"라며 가루가 되도록 까이던 그 장면. 우리도 현장에서 "이게 효율적입니다"라고 했다가 "내 눈엔 그냥 네 맘대로 하는 걸로 보여!"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모두 각자의 런웨이에서 굽 높은 힐을 신고 비틀거리는 안드레아가 된다.
미란다는 안드레아에게 스타일을 가르친 게 아니라, 그 환경에 순응하는 법을 주입했다. 우리 상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의 전문성이 아니라 본인들의 안락한 통제권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 그거 진짜 무서운 말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반짝였나.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를 외치던 눈빛은 레이저라도 쏠 기세였다. 하지만 보고 누락이라는 명목하에 날개가 꺾이기를 수십 번 반복하다 보면, 사람은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신기루 현상이다.
열정 만수르였던 박 대리 : 어느 순간 "어차피 안 될 건데 뭐..."라며 점심 메뉴 고르는 데만 온 에너지를 쏟는다.
부족해 보이던 김 사원 : 말 잘 듣는 환경에서 영혼 없는 예스맨으로 거듭나더니, 상사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보는 입장에선 복장이 터진다.)
멀쩡한 사람이 이상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내가 내린 결정이 번번이 무시당할 때, 뇌는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생각하면 다친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자.' 그렇게 우리는 창의성을 반납하고, '네, 알겠습니다'라는 자동 응답기가 되어간다. 환경이라는 거대한 맷돌이 우리라는 원석을 무색무취한 모래알로 갈아버리는 셈이다.
영화 속 안드레아는 결국 깨닫는다. 미란다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화려한 명품 코트를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정확히는 분수에 던졌던가?). 그녀가 깨달은 건, 아무리 화려한 환경이라도 그 안의 사람이 나를 좀먹는다면 그곳은 지옥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환경은 건물이 만드는 게 아니다. 최신형 복합기나 무제한 간식 바가 환경을 결정하지 않는다. 환경은 사람이 만든다. 내 판단을 신뢰해 주는 동료 한 명, "네 생각이 일리가 있네"라고 말해주는 상사 한 명. 그 사람이 곧 나의 근무환경이다.
내가 선조치를 했을 때, "결과는 좋았지만 다음엔 미리 귀띔이라도 해줘. 내가 널 방어해 줄 수 있게"라고 말해주는 상사가 있다면? 그곳은 성장의 토양이다. 반면, 결과가 어찌 됐든 "내 권위에 도전하는 거야?"라며 핏대를 세우는 상사가 있다면? 그곳은 탈출해야 할 재난 구역이다.
혹시 지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는 소리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가? 그렇다면 기억하자.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당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그 환경이 문제인 거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현장에서 선조치를 고민하는 유능한 전문가들이다. 비록 지금은 보고 체계라는 감옥에 갇혀 의견이 묵살당하고 있을지라도, 당신의 그 날카로운 판단력까지 녹슬게 두지는 말자.
안드레아가 마지막에 미란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 자기 길을 갔듯, 우리도 언젠가 사람이 중요한 진짜 환경을 찾아 떠날 힘을 길러야 한다. 환경은 사람이 만든다. 그리고 당신 또한 누군가에게는 환경이 된다. 훗날 당신이 누군가의 상사가 되었을 때, "왜 보고 안 했어!" 대신 "오, 이 결정 나이스한데? 다음엔 나도 끼워줘!"라고 말할 수 있는 멋진 환경이 되어주길 바란다.
자, 이제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가자. 상사가 또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린다고? 속으로 영화 대사 한 마디만 읊어주자.
"That's all. (이상, 나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