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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우 Dec 09. 2022

연애영화와 시적인 것

les annees campagne (시골의 나날)


연애 이야기가 영화로 성립되기 위한 조건 중에는 서로 어긋난 편애와 망설임으로 인한 숨김과 오해가 대표적이다. 특히 일본 연애영화나 드라마의 대부분은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시점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다수는 마지막 씬이나 마지막 회의 끝부분에 공항이나 터미널로 달려가면서야 마음을 전달해야 했고 심지어 자막이 올라가는 중에서야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매우 답답한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스토리가 중단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감상하는 내내 가슴을 조리며 답답해해야 했다. 연애란 그런 것인가 보다. 연애의 종착지는 결혼이다. 결혼 후에 일어날 다양한 사건이나 행복, 불행은 연애 당사자들에겐 관심을 가질 겨를도 없다. 마치 하나의 스포츠 경기처럼 이 경기에 이기느냐 지느냐가 최대의 관심사다. 경기 후에 어떤 것이 기다릴지는 상관없다. 스포츠의 여러 장르처럼 연애드라마도 장르가 있다. 학창 시절 첫사랑, 결혼은 전제한 청춘드라마. 중년, 노년의 중후한 사랑 또는 불륜 등. 그러나 모두들 최종 결말은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이며 그 이후의 전개는 예측조차 하기 귀찮은 불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불행의 최종 목적지인 지옥은 연령별, 성별, 계층별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행복의 목적지인 천국에 대해서 어떠한 자료나 근거도 없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을 기반으로 정리하자면 인간의 행복은 마지막의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순간의 희망하는 삶 자체가 불행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일단 불행하며 그것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다. 물론 삶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도 희망과 단절한 허전함이라는 그늘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든 삶이란 것의 근본은 불행이다.


기독교에서 원죄라고 부르는 인간의 불행을 자초하는 본성인 번식 본능은 연애의 탄생을 의미하며 그것을 세상에서 사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애초에 에덴에는 번식도 필요 없었고 사랑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화과를 먹기 전까지는.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에게는 끝이란 개념의 탄생과 함께 죽음이란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인간은 그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신에게 애원하는 종교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는 풍습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신을 벗어난 인간의 자존심이라는 반항심도 자생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르네상스라고도 하지만 실은 르네상스는 신을 모방하는 불완전한 인본주의였다. 진정한 인간의 자존심은 시적인 감성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늘의 무한한 이득, 그러나 인간은 거친 대지에서 시적으로 살아간다>라는 말이 있다. 즉 신의 종으로서 편안한 삶은 굴욕으로 생각하며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황량한 대지에서 시적인 삶을 발명한 것이다. 시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삶의 규칙을 전혀 다른 규칙으로 변환하는 작업이다. 즉 전에 없던 새롭고 다양한 인식을 인정하는 것이다.     


십진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진법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해답 법이기 때문이다. 1부터 9번을 더해야 10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2진법은 하나 만 더하면 바로 10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산법으로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고 만들 수 있냐고 하지만 2진법은 이미 디지털 세상을 만들어 십진법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현상에 대한 해석의 다양한 변수를 보수적인 착실한 시선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토록 착실하게 노력했는데 왜 이따위 결과가 나오느냐>라는 것이다. 

연애에서는 <그토록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왜 그녀는 나를 싫어하는가>, <싫어하는 그녀에게 관심도 없는데 그녀는 왜 나를 좋아하는가>. 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해답은 누가 정한 것인가. 그런 오류투성이인 해답에 사람들은 세상의 부조리라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것은 자신만 모르는 조리 있는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조리는 단순 배신을 넘어 수많은 답들이 존재한다.

<왜 웃기는데 눈물이 나오나>, <이처럼 괴로운데 마음속에서 숨어있는 이상한 쾌감은 뭔가>, <이처럼 외로운데도 혼자 있고 싶은가>, <그토록 원하던 여인이 내게로 왔는데 이 알 수 없는 허전함은 뭔가>, <왜 그녀와 이별하는 마당에 배고픈 것인가>, <자신은 자존심보다 사랑이 강하다는 착각>...

이처럼 다양하고 응용 가능한 인간의 감정을 그동안 어떤 이의 해석에 의존해 왔던 것인가.

시적이라는 것은 이런 지금까지의 단출했던 인식과 감정의 틀 너머의 넓은 세상을 안내하는 새롭고 애정 어린 인식법이다. 


사랑이란 현상은 그녀와 즐거운 경험 후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만의 시간적 기다림의 맹렬한 갈등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와 다시 재회하는 순간은 사랑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다가 헤어지면서 다시 가동되는 것이다. 만약 만나서 헤어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사랑은 소멸되는 것이다. 또한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사랑은 그리움으로 변환된다. 그런데 중년을 넘은 사람이 첫사랑의 연인을 아직도 실제로 만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동안 지쳐있던 사랑을 끝내고 싶은 자아의 의지 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랑은 괴로운 감정의 시간적 상태 자체이지만 그것을 시적으로 해석하면 단순히 괴로움을 초월한 또 다른 세계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정 드라마의 감성적 해석은 무궁무진할 수 있는 것이고 어떤 해석을 취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영화  les annees campagne (시골의 나날)

1992 / Philippe Leriche감독 / 프랑스

출연 : Charles Aznavour (Le Grand-Père) Benoît Magimel (Jules) Sophie Carle (Evelyne)     


이 연애영화는 도시가 아닌 시골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순수하고 깨끗한 첫사랑을 치밀하게 강조한 영화이다.

시놉시스는 이렇다.

부모의 문제로 할아버지 ‘Le Grand-Père(Charles Aznavour)‘와 함께 시골에서 지내는 15세의 소년 ‘Jules(Benoît Magimel)’ 낯선 자연의 시골생활과 동네 친구들과 적응하려고 고군분투한다. 그곳에서 동네의 소녀 ‘Evelyne(Sophie Carle)’을 만나 첫사랑을 시작하게 되지만 어머니의 사고와 함께 마을을 떠나게 되면서 그녀와도 헤어지게 된다.

우리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던 그 시절 청춘의 이야기이다. 더불어 그 아름다운 기억에서 해방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 빛나는 보석 같은 장면으로 귀결되어있다. 마지막 장면에 사랑과 이별의 찬란함이, 그리고 그것이 평생을 함께 할 청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Charles Aznavour의 음악과 함께 집약되어있다. 사랑은 헤어짐의 추억으로 인생의 지워지지 않을 컬러가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헤어지기 때문에 생산되는 것이고 헤어지지 않는 연인은 이미 연인이 아니다.

여자 주인공은 흔한 일본 영화처럼 영화의 최후에 다다를 때 까지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지막에 소년을 태우고 떠나는 버스를 자전거를 타고 배웅하는 소녀는 유머스러운 행동까지 하는데 그게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버스가 멀어지고 소년의 모습이 안 보일 때쯤 처음으로 진심의 표정으로 바뀐다. 그것은 길어야 3초 정도였다. 그것으로 두 남녀는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청춘의 아름다운 흔적을 문신처럼 새긴 것이다. 


사랑은 멋지게 헤어질수록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이 아깝다고 근근이 이어가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사랑을 갉아먹는 것과 같으며 욱한 마음에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려는 과격한 승부욕에 지나지 않는 사랑의 폭파 행위다. 과연 이별은 단순히 슬프고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별의 경험이 없는 삶이야말로 처참한 것은 아닌가. 슬픈 아름다운, 괴로운 쾌감, 복잡한 안정. 이런 것들은 일상을 시적으로 해석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숨겨진 기쁨이며 숨겨진 일상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이득을 섣불리 포기하면 안 된다. 그것은 천상의 따분한 이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https://youtu.be/5owcdxV9ZkY


이 영화는 우연히 프랑스 채널(TV5 monde)에서 후반부터 잠깐 본 것이다. 엔딩곡은 사를르 아즈나블의 노래도 좋지만 역시 여자 주인공이 직접 부른 사운드트랙과는 비교할 수 없다. 비록 가창력은 모자라지만 여기서 가창력을 말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인터넷으로 사운드트랙 원곡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상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영상을 캡처한 음원을 발견하고 바로 다운로드하여서 영화의 영상들과 함께 편집한 것이다. 이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소중한 영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프랑스 가수 ‘Aram Sedefian‘도 이영상에 코멘트를 남겼다. 너무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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