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한(恨)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파주 지역에서 1차 중대장 시절.
첫 아이를 임신한 아이 엄마와
첫 휴가를 나와 집에 잠시 들렀다가
8월 1일 집중호우로 비상소집이 되었습니다.
당시, 작전지역이 홍수에 거의 잠겨 있었지요.
파견 나가있는 소대를 철수시킬 것인가를
결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새벽 대대장실에서 지휘관 회의 중
관사에서 군 전화가 울렸습니다.
대대장 사모님이 아이 엄마 진통이 있으니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전해주셨습니다.
길은 군데군데 잠겨있고, 파여 있기도 했습니다.
구급대에서는 인력이 다 파견되어 있어
관사까지 들어올 수 없다고 할 뿐
제가 운전해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새벽 01시쯤 출발해서
의정부 성모병원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응급실과 통화하며 끝없는 폭풍우를 뚫고
응급실에 도착한 시간이 02:20이었습니다.
옆에서 일하시던 남자 간호사께서
아이엄마를 보자마자 휠체어에 태워
6층 산부인과 진찰실로 향했습니다.
갑자기 의사 2명이 뛰어들어가고,
주변이 소란해졌지만 눈에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분만실 들어갈 시간이 없어요.
여기서 분만합니다.'
그렇게 02:42분에 첫울음을 터트린 아이가
바로 '천둥벌거숭이'입니다.
의사 선생님들도 욕설을 참 찰지게 잘하시더군요.
군복을 입고 있는 건장한 장교에게..
그렇게 천둥벌거숭이는
블록버스터처럼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자라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사관학교에서 근무 중이었지요.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참 야근을 하고 있는데
얼굴이 피칠갑이 된 아이를 안고 아이 엄마가
제 사무실에 뛰어들어왔습니다.
놀다가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혔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서 데리고 왔다고.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몇 바늘 꿰매고
관사에 복귀했는데 아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밤새 울었습니다.
응급실에서는 놀라서 그런 것이니
다음날 안과 진료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다음날 저는 평소처럼 출근했고
아이는 종합병원 안과에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15:30으로 기억합니다.
아이 엄마의 통곡에 찬 전화.
'아이의 한쪽 눈이 실명할 수도 있다.'
더 큰 병원에 빨리 가봐야 한다.
그렇게 아이는 한쪽 눈의 시력을 영구히 잃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니,
시력이 없는 쪽이 사시가 되어가더군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사시 수술을 받았습니다.
건강보험에서는 미용목적의 수술이니
보험 적용이 불가하다고 했지요.
세상의 절차는 꼭 닿아야 할 곳에
닿지 않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제 가슴에 한을 두 번이나
한을 맺힌 놈이 바로,
'천둥벌거숭이'입니다.
커가면서 어지간히 말 안 듣는다 싶었지만
아이엄마가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 자리에서도
크게 마음고생 시키지 않고 잘 자랐습니다.
커서는 뭔가 이루는 것 없이
겉모습만 치장하고 다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싫은 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천둥벌거숭이에게는 그게 아빠에 대한
서운함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 알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블록버스터처럼 세상에 나와서
시력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밝게 커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저와 같이
욕심과 후회의 줄타기를 하면서
아이를 양육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나 재능에 욕심부리지 마세요.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부모란 결국 후회의 줄타기 위에서
사랑을 배우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이에게 말해주세요.
'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참 행복하단다.'
이 천둥벌거숭이는 벌써 27살이 되어
아빠의 간섭을 떠나
홀로 골프장 캐디 정직원으로 근무 중입니다.
물론, 전화 한 통도 없는 놈이지요.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계속 고딴식으로 '건강해라'
덧붙임) 이때의 제 감정이 어땠는지는
하나하나 풀어서 써 볼 요량입니다.
다음 편을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