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인간 중심, 미래 사회 생존 전략

왜 '사람'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가

by 김정덕

"우리 회사는 인간 중심 경영을 추구합니다.", "이 AI는 인간 중심 설계를 적용했습니다." 최근 비즈니스, 기술, 정책 등 분야를 막론하고 '인간 중심'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AI)과 그만큼 고도화되는 보안 위협 속에서, 이 용어는 마치 미래를 여는 열쇠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정작 '인간 중심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을 위한 것', '사용하기 편한 것' 이상의 답을 내놓기 어렵습니다.


단언컨대, 인간 중심은 단순히 '사용자 친화적(User-Friendly)'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이는 기술과 시스템의 근본적인 설계 철학을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며, 기술 과잉과 복잡성의 시대에 우리 사회가 마주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입니다.


기술 만능주의의 한계와 새로운 가치의 부상


20세기가 기술적 정복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그 기술이 남긴 그림자를 마주하는 시대입니다. 기술 우선주의(Tech-first) 패러다임은 '효율'이라는 목표를 위해 '인간성'이라는 가치를 비용으로 취급했습니다. 그 결과, 알고리즘은 사회적 편견을 증폭시키고 소셜 미디어는 고립감을 유발하는 등 기술의 역기능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술의 종속 변수가 아닌 주체로서 인간의 존엄성, 자율성, 심리적 안정감을 복원해야 할 때입니다.


동시에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동력도 변했습니다. 과거 산업 시대의 가치가 '생산성'과 '규모'에 있었다면, 지금의 디지털 경제는 '신뢰', '경험', '관계'에서 가치를 찾습니다. 고객은 단순히 기능이 좋은 제품을 넘어,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고 긍정적인 경험을 주는 브랜드를 선택합니다. 인간 중심 접근은 이러한 무형의 자산을 구축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현명한 경제적 투자입니다.


'복잡성의 시대'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


기후 변화, 팬데믹, 사이버 안보 위협 등 오늘날의 문제들은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나 단일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s)'입니다. 이러한 복잡계 문제 앞에서 기존의 하향식, 분절적 해결 방식은 무력합니다.


인간 중심 접근법이 가진 시스템적 사고(Systems Thinking)와 다학제적 협력은 이 복잡성을 해결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공감), 작은 해결책을 빠르게 시도하며 배우고(반복 개선), 전체 시스템에 미칠 영향을 함께 예측하는 과정은 사회 전체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필수 역량입니다.


이제, '인간 중심 보안'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인간 중심’ 철학은 디자인(HCD), 인공지능(HCAI),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공감'을 통해 문제 자체를 재정의하고, AI는 인간의 '파트너'를 지향하며, 헬스케어는 '환자 여정' 전체를 설계합니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 중심 보안(People-Centric Security)'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보안은 '사람이 가장 약한 고리'라는 전제 아래 사용자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을 만듭니다. 실제로 보안 사고의 절대 다수가 인간의 실수, 무지, 혹은 악의에 의해 발생하기에,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탓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최신 '인간 중심 보안'은 이 관점을 180도 전환합니다. 구성원들이 왜 위험한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를 파고들어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처벌과 통제가 아닌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강력한 보안 문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 중심 보안이란 '보안이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가치를 지키는 긍정적 경험이 되도록 시스템, 정책, 문화를 총체적으로 설계하는 전략' 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4가지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업무를 '막는' 보안에서 '돕는' 보안으로 (Frictionless Security): 보안 절차가 복잡하고 불편하면 사람들은 우회로를 찾습니다. 업무 흐름에 매끄럽게 통합되어 사용자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안전이 확보되는 '마찰 없는 보안'을 구현해야 합니다.


'제로 트러스트'를 넘어 '신뢰 기반 권한 위임'으로 (Trust but Empower): 모든 것을 의심하기보다, 구성원에게 명확한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여 스스로 현명한 보안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신뢰하고 권한을 위임해야 합니다.


'왜?'라고 묻는 공감의 자세 (Empathy-Driven Security): 구성원이 보안 규정을 어겼을 때, 비난하기 전에 '왜 그랬을까?'라고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이 공감의 자세가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공포'가 아닌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Security as a Shared Purpose): 해킹 사례를 나열하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방식은 단기적 효과에 그칩니다. 대신, '우리의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성공을 위한 일'이라는 공동의 목표 의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마치며: 미래 세대를 위한 윤리적 책임


AI와 생명 공학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넘어 '무엇을 만들어야만 하는가' 라는 윤리적 질문에 답해야 할 역사적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인간 중심 접근은 기술 발전의 방향을 결정하는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기술이 인류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보장하는 것, 이는 현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져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적 책임입니다.


이는 CISO를 비롯한 보안 리더들에게 기술 전문가를 넘어 조직 문화 설계자이자 구성원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역할을 요구합니다. 결국, 우리 조직의 가장 강력한 방화벽은 값비싼 솔루션이 아니라, 보안을 자신의 일로 여기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심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 아닌, 디지털 시대의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덕] AI 보안 거버넌스의 3대 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