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억하는 기계, 망각하는 인간

기억의 감옥에서 레테의 강을 꿈꾸다

by 김정덕


그리스 신화 속 저승의 입구에는 망자들이 건너야 하는 ‘레테(Lethe)’의 강이 흐릅니다. 이 강물을 마신 영혼은 생전의 모든 고통과 수치심, 그리고 무거운 기억들을 하얗게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평온한 안식을 얻거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망각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과거의 짐을 벗고 현재를 살게 하는 ‘신이 내린 자비로운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문명에는 이 자비로운 레테의 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남긴 찰나의 기록, 치기 어린 감상의 흔적, 혹은 지우고 싶은 과거의 실수들은 거대한 서버 속에 ‘디지털 박제’되어 영구히 보존됩니다. 물리적 일기장은 태우면 한 줌의 재가 되지만, 디지털 데이터는 시간의 풍화를 겪지 않고 영원히 날카로운 상태로 보존됩니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인데, 기계는 완벽하게 기억하는 이 비대칭적 세상에서,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기술의 축복일까요, 아니면 끝나지 않는 형벌일까요?


푸네스의 비극과 니체의 능동적 망각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완벽한 기억력이 인간에게 축복이 아니라 끔찍한 저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우화입니다. 주인공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 세상의 모든 세세한 것을 영원히 기억하는 병에 걸립니다. 그는 1882년 4월 30일 새벽의 남쪽 하늘 구름 모양이나, 책에서 본 모든 단어의 형태를 사진처럼 기억하게 됩니다. 언뜻 보면 엄청난 능력을 얻은 것 같지만, 푸네스는 결국 방안에 틀어박힌 채 미쳐갑니다. 사소한 기억의 파편들이 끊임없이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오자, 그는 사물들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개념화'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이 소설을 통해 "망각이 없이는 사유도 없다"는 묵직한 철학적 진리를 던집니다.


나아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망각을 단순한 기억력의 감퇴나 수동적인 상실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망각은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생명력'의 발현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마음을 위장에 비유하며, 음식을 소화하고 배설해야만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듯,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잊고 비워내야만 현재에 집중하고 새로운 미래를 결단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즉, 망각 능력이 고장 난 인간은 과거라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푸네스의 비극과 니체의 통찰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거대한 서버(서치 엔진) 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경고를 던집니다.


주홍글씨가 된 데이터와 잊힐 권리의 탄생

모든 것을 기억하는 기계의 폭력성이 현실의 법정에서 최초로 제동이 걸린 사건이 있습니다. 2014년 유럽사법재판소(ECJ)에서 판결을 내린 이른바 '마리오 코스테하 곤살레스(Mario Costeja González) 사건'입니다. 스페인 남성인 곤살레스는 구글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할 때마다 16년 전 빚 때문에 집이 경매로 넘어갔던 지역 신문의 기사가 가장 먼저 뜨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미 빚을 다 갚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인터넷의 알고리즘은 그를 영원히 '파산한 채무자'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검색 엔진의 경제적 이익이나 대중의 알 권리보다 우선할 수 있다"며 구글에 해당 링크의 삭제를 명령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법적으로 인정된 기념비적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법적 권리가 인정되었음에도, 기술은 여전히 망각을 거부합니다. 현대 사회에는 너새니얼 호손 (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제목처럼 인터넷이 새로운 '주홍글씨'로 작용하는 현상이 만연합니다. 10년, 20년 전의 단편적인 글이나 사진이 누군가에 의해 발굴되어 현재의 삶을 파괴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이른바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대표적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상을 떠난 이들의 디지털 흔적을 유족 대신 지워주거나, 살아있는 사람의 과거 흑역사를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세탁해 주는 '디지털 장의사(Digital Undertaker)'라는 신종 직업까지 성업 중입니다. 잊히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역설적인 사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권리와 맥락의 거세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과거의 정보가 위험한 이유는, 알고리즘이 인간의 '성장'과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제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라도 오늘 반성하고 내일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데이터베이스 속의 인간은 단지 과거에 클릭했던 기록, 과거에 썼던 문장, 과거에 구매했던 물품이라는 평면적인 점(Point)들로만 존재합니다.


알고리즘은 15년 전의 철없던 발언을 어제 한 발언과 동일한 가중치로 화면 최상단에 끌어올립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반성과 성숙이라는 맥락은 철저히 거세당합니다. 결국 모든 것을 기억하는 디지털 공간에서 잊힐 권리는 곧 '다시 시작할 권리'이자 '용서받을 권리'입니다. 만약 한 번의 실수가 영원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누구도 나를 과거의 감옥에서 풀어주지 않는다면, 인간은 변화하려는 의지 자체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한 기억을 가진 기술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망각하는 능력'입니다. 기술이 인간을 위해 복무하려면, 차가운 데이터의 보존을 넘어 인간의 연약함을 보듬고 갱생을 허락하는 인간다운 결함(망각)을 모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디지털 다이어트와 사회적 관용

과거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새로운 행동 양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첫째, 개인 차원의 '디지털 다이어트'를 주기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소셜 미디어에 감정적인 글을 올리기 전에 이것이 10년 뒤의 나를 대변해도 좋을지 한 번 더 멈춰 서서 사유해야 합니다. 더불어, 일정 기간이 지난 게시물이나 사용하지 않는 과거의 계정들은 정기적으로 폐쇄하고 삭제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플랫폼이 제공하는 '자동 삭제' 기능이나 '보관함' 기능을 활용하여 나의 디지털 발자국을 스스로 통제하는 주권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타인에 대한 '디지털 관용'의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제도적으로 잊힐 권리를 법제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과거 실수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우리들의 성숙한 태도입니다. 과거의 파편화된 데이터 하나로 한 인간의 전체를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디지털 마녀사냥을 경계해야 합니다. 잊힐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곧 타인에게 '과거의 나'와 결별하고 '새로운 나'로 살아갈 기회를 허락하는 가장 품격 있는 연대입니다.


보르헤스의 푸네스는 잊지 못해 파괴되었지만, 우리는 잊음으로써 구원받습니다. 완벽하게 기억하는 차가운 기계들의 세상에서, 우리는 기꺼이 잊어주는 따뜻한 인간의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사유의 광장: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만약 오늘 밤 당신이 가진 모든 디지털 기록 중 딱 하나를 영구히 삭제할 수 있다면, 10년 전의 어떤 기록(사진, 글, 검색 기록 등)을 지우시겠습니까?

성범죄자나 중대 범죄자의 과거 기록을 지워달라는 요구는 '대중의 알 권리(공익)'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알 권리와 잊힐 권리가 부딪힐 때, 우리는 어느 시점에, 어떤 기준으로 '디지털 사면'을 허락해야 할까요?

타인의 과거 잘못이 담긴 옛날 기사나 캡처본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그것을 평가의 잣대로 삼습니까, 아니면 변화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번 판단을 유보합니까?


참고문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중 〈기억의 천재 푸네스〉, 송병선 역, 민음사, 2011 (Original work published 1944).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김정현 역, 책세상, 2001 (Original work published 1887).

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씨》, 김욱동 역, 민음사, 2003 (Original work published 1850).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 《잊혀질 권리》, 구본권 역, 지식의날개, 2011 (Original work published 2009).

Jeffrey Rosen, "The Right to Be Forgotten", Stanford Law Review,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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