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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철 Jul 01. 2024

프롤로그 : 나의 밥메이트 일드

기쁜 날도 슬픈 날도 함께였다

2022년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밥상을 차리고 일본 드라마를 틀었다. 

나에게는 20년 가까이 된 루틴이었다. 그런데 밥을 먹다가 당황한다. 

와 나 지금 화면보다 밥그릇을 더 많이 쳐다보네? 

게다가 밥그릇을 보면서 들려오면 말도 안 되는 흐름에 비웃음까지 치고 있네? 

이제 일본 드라마도 고인물을 넘어서 썩은 물이 된 건가? 

안돼, 내 즐거운 공부 소재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어! 

나는 그렇게 일드를 놓아주지 못하고 옛날 작품까지 뒤적이며 

계속해서 여의주와 같은 일드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렇게 매일같이 찾다 보니 주옥 같은 일드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가뭄에 콩 나듯 이지만 어쨌든 나온다. 그래! 일드 아직 재밌는 것들 많다고, 

그리고 예전에 주목받지 못한 작품도 정말 괜찮은 것들이 많다고! 목청 높여 말하지만 

이미 반도체 마냥 갈라파고스화된 일드 주변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됐다. 

이대로 또 사람들이 봐주지 않으면 일드는 도태되고 말거야! 라는 위기감에, 

그리고 (진짜 목적) 모처럼 재밌는 일드인데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을 찾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됐다. 


내 인생 곳곳에 일드가 있다. 그야말로 인생 일드다. 


한참 첫 회사에서 상사에게 복수를 꿈꾸며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다니던 시절에는 

‘한자와 나오키’를 보며 함께 눈을 부라렸다. 물론 나중에 다시 봤을 때는 다른 느낌으로 보기도 했다. 회사를 관두고 카페 창업을 준비할 때는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를 보며 삶의 태도에 대해 정비하기도 했다.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중쇄를 찍자’를 보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실패를 곱씹으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모든 게 다 귀찮아지고 나 왜 이러지 싶을 때는 ‘나기의 휴식’을 보며 함께 휴식하기도 했다. 내 마음도 노곤해져 어느새 일상을 다시 마주할 힘을 얻었다. 그리고 정말 온 힘을 다 쏟아부어야 할 때는 ‘불모지대’를 보며 그래, 주인공보다 힘든 삶도 아닌걸?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 인생 터닝포인트 곳곳에 나에게 영감을 주고 위로를 건네 준 일드들이 있다. 

그러한 일드가 어느 샌가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는 거다!  


 

정말 도태되기 시작한 것인지 나 역시 도중에 하차하는 드라마도 있다.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부어잡고 마지막회에서 어떻게 잘 마무리 해줄 수 없겠니 하면서 본 드라마도 있다. 그렇게 망작을 끝까지 보면서 든 생각은 누군가에게 이게 첫 일드면 어떡하지? 였다. 

‘첫’이라는 말이 붙은 건 다 애틋하고 소중한 기회인데, 예전에야 재밌다던 소문 듣고 다운로드 해서 봤지만 

지금은 OTT서비스에서 아무거나 골라 집을 수 있다. 누군가의 첫 일드를 망칠 수 없다. 

분명 당신은 일드를 좋아할 수도 있는데 망작으로 인해 모든 일드는 오글거리고 개연성 없고 

개발새발 연기에 애매한 병맛이야 라고 말하게 할 순 없다. 


그래서 대충 어림잡아 20년간 일드를 봐 온 내가 괜찮은 일드, 매력적인 일드들을 여러분의 첫 일드로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막기 위해 내가 흐린 눈으로, 정말 오래된 의리로 괴롭지만 끝까지 본, 혹은 당신을 일드계에서 떠나게 만든 일드들 “보지 마세요 리스트”도 소개하고자 한다. 


한 때는 참 잘 나가던 일드. 

내가 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고쿠센’, ‘꽃보다 남자’와 같은 일드 열풍이 있었다. 

학기가 끝나면 선생님들이 좀 쉬어 가는 시간으로 영상을 보여주곤 했는데 

내가 늘 CD에 일드를 구워서 모두에게 틀어주곤 했다(후후 어린 친구들, CD를 굽는 게 뭔지 아실랑가). 

그런데 이젠 K 드라마가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일본 드라마는 유치하고 그렇다고 진짜 B급의 느낌을 가진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일본 영화를 주제로 나눈 대화가 계기가 되어 만난 내 짝꿍은 이제는 애매모호한 일드에 신물이 났는지 일본 드라마 불매 운동을 시작했다. 이제 일드 안 보면 안 돼…? 라며 한껏 신물 난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다. 그래도 나는 도전한다. 그냥 틀어버린다. 그러다 내 짝꿍에게도 다시 (아주 작지만) 일드붐이 일어났다

(그 시발점이 된 작품이 바로 ‘하야부사 소방단’이다).


(여기서부터는 시간 있는 분들만 읽으셔도 오케이!) 

아 일드는 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추천하는 드라마가 있다. 

주제곡이 더 유명한 ‘언내추럴’이라는 드라마다. 

부검의의 입장에서 사건 사고를 바라보는 관점을 다룬 드라마인데, 

매회 당연히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담담하면서도 

사회문제의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운 관점과 또 인간미 있는 따뜻한 관점이 공존하는 드라마다. 

전체적으로 배우 연기도 훌륭하다. 

그리고 이시하라 사토미의 외모를 강조하지 않고 배우로서 좋은 점을 잘 활용한 드라마는 정말 몇 없는데 

언내추럴이 그 중 하나다. 곧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고자 버텨내 살아내고, 

절망이라는 단어에 대해 묻자 ‘절망할 시간이 있으면 맛있는 거 먹고 잘래’라고 태연하게 답하는 주인공.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일하지만 그런 부검에 대해 미래를 위한 의료라고 말한다. 

그런 모습들이 아주 담백하게 그려진다. 두 주먹 불끈 쥐고 희망적인 걸 넘어 낙관적인 태도, 어딘가 모르게 백치미를 넣어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런 일드도 있다. 

언내추럴의 그런 담백하고 대담한 삶의 태도가 나에게 곧잘 위안을 주곤 했다. 

내가 세상을 바꿀 거야!와 같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행동으로 옮기는 게 이 드라마의 기본 자세다. 

언내추럴은 여러 번 정주행 했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드라마지만 

아마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드라마이기에 이번에는 패스했다. 


이번에 내가 소개하는 드라마가 당신의 첫 일드 또는 오래간만에 다시 보게 된 일드가 되고 

그렇게 일드에 다시 입문하게 된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을 거다. 

언젠가 만나서 일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꿈꾸며! 


'언내추럴'의 유명한 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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