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을 정리하는 유품 정리사와 삶을 시작을 목도하는 산부인과의 로맨스
한국 드라마에서 씩씩한 여주인공과 재벌집 아들의 러브스토리가 안방을 강타하듯 일본에서도 로맨스물의 왕도가 있다. 바로 코믹병맛비현실로맨스(주로 만화 원작) 또는 평범한 일상에 비현실 두 스푼 떨군 듯한 리얼리즘인지 초현실주의인지 헷갈리는 잡탕식 드라마. 보지 마세요 리스트에 넣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 이런 류의 일드다. 그래서 연애물은 피해왔는데 정말 볼 만한 일드가 없어서 그래 한 번 요시타카 유리코를 믿어보자 하는 맘으로 틀어본 것이 바로 이 '별이 내리는 밤에'다. 요시타카 유리코는 꽤나 작품을 잘 고르는 편이라 대체로 출연작들의 퀄리티가 좋은 편이다.
근데 웬걸, 간만에 최애로 삼을만한 캐릭터를 찾았다. 그리고 설렜다.
연애물은 사실 이게 전부지. 게다가 웬 떡이야 싶을 정도로 구석구석 삶의 단면을 잘 모아놓은 보석같은 작품이었다. 유리코 언니 아리가또-! (다행히도 나보다 살짝 언니였다)
일단 설정이 꽤나 비상한데 표현 방식은 매우 담담하다.
우리 주인공 둘이 뛰어넘어야 할 장벽부터 생각해보자.
둘의 직업, 산부인과의와 유품정리사. 솔직히 좀 격차가 느껴진다. 뭐 이건 좋다 이거야.
그리고 또 하나. 유품정리사인 남주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음성인식, 그리고 수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이런 드라마는 보통 눈물 쏙 빼면서 시작하는데, 이 드라마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둘의 만남 자체는 아무래도 좀 억지스럽긴 한데, 그것만 빼면 이 드라마는 진짜 진국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3화까지 참고 보자! 다들 알죠? 명드는 3화부터!) 여주는 남주와 첫 만남 때 만취로 인해 거하고 토를 했고 그 다음날 남주에게 수어로 욕(?)을 듣게 된다. 여주는 뭔가 나쁜 말이겠거니 하고 필사적으로 그 말을 알아냈고 으악! 이불킥을 반복하면서 잊어버리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재회하는데 그 곳은 바로 여주 엄마의 장례식장이었다. 딸을 홀로 키워 낸 엄마는 나이가 들어 짐 정리를 위해 유품정리를 신청했고 그렇게 한 달 뒤 숨을 거뒀다. 엄마와 떨어져 살았던 외동딸은 그저 하염없이 슬펐고 홀로 숨을 거뒀을 엄마가 가엾고 엄마를 혼자 둔 본인이 너무 미워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엄마의 유품을 가지고 등장한 것이 바로 남주다. 그 때의 무례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엄마가 남긴 유품에 대해 설명해주고 당신에 대해 정말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던 모습, 그리고 엄마가 참 활발해 사람들과 잘 어울렸던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며, 유쾌한 분이었다는 이야기, 쓸쓸하지 않으셨을 거란 근거 있는 말들을 건넸다. 그제서야 여주는 목놓아 운다. 그렇게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남주 역시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고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렸는데 유품정리사를 만나 부모님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전달받으며 위로를 받았고, 이런 정리 과정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고 유품정리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래서 고객만족도 1위의 에이스로 활약 중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람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유품을 정리하고 유품을 통해 그 사람의 의중을 헤아리며 그걸 유가족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한다.
귀가 안 들리지만 수어를 통해 고스란히 감정을 정성스레 전달하고 또 상대방을 지긋이 바라보며 어떤 의미론 늘 경청하는 태도를 가진 남주, 반전 매력으로 장난끼도 많아 안 들림에도 여주와 함께 능청스럽게 춤을 추기도 한다.
사실 여주는 의료소송에 휘말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대학병원에서 생명을 눈앞에 두고 너무나도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이 견디기 힘들어져 시골 산부인과로 왔다. 의료소송을 건 사람은 산모가 출산 중에 목숨을 잃었는데 다행히 아이는 구할 수 있었음에도 아내를 잃은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끈질기게 여주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그런 한편, 출산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뱃 속 아이까지 잃은 한 공무원 남자는 그 당시 레지던트였던 여주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 한 켠에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공무원을 관두고 본인도 산부인과의가 돼서 여주가 있는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이렇듯 같은 불행을 겪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우리의 삶은 크게 변한다.
그 밖에도 헤어진 남편의 딸을 친딸처럼 키우고 그런 자신의 딸이 친모를 찾아갈까 전전긍긍하는 엄마, 한 때 핑크레이디 두목(?)으로 활약하다 갑작스런 임신으로 아이를 낳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간호사가 된 싱글맘(웃긴 게 아빠가 누군지 아들과 엄마 모두 관심이 없다), 과로와 영업직의 스트레스로 회사를 그만두고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다가 처음으로 수어를 배워 숨통이 트이게 된 유품 정리사 동료…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님에도 각자 그 날들을, 그 사건들을 고스란히 나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덤덤히 일상을 누리며 살아간다.
여주는 남주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수어를 열성적으로 배우고 연습하는데 오히려 그걸 보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괜찮다고 천천히 말해도 우리는 늦지 않았다고 미소를 짓는 모습의 남주를 보면 나이나 직업, 신체적인 특징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모습은 온전히 그 사람이 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로맨스물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참 인상 깊고 뭉클하다. 유난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나답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세상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기준으로 살아보자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주가 참 귀엽다. 일본 드라마 하면 자주 떠오르는 기찻길 건너편에서 남주가 수어로 고백하는 장면이 아주 명물이다. 나도 모르게 수어를 따라하게 되고 발을 동동 굴리며 숨죽여 소리지르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나처럼). 나의 이런 환호 장면도 참 귀하달까? 무더위에 지치는 이 계절, 밖은 참 위험하다. 이럴 때 집에서 시원한 아이스 커피 한 잔과 함께 또는 여유의 차 한 잔을 즐기면서 이 드라마를 본다면 오래간만의 설렘과 삶을 대하는 쿨한 태도 그리고 따스함을 모두 느껴볼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