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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Choi Apr 09. 2018

약간의 거리를 둔다

나는 사실 조금 지쳤던 것 같다. 이게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어느 날 돌아보니 “아무 의욕도 생기지 않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일도, 사람도, 삶도, 어느 것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책을 한 페이지도 읽을 수가 없었고 어떤 약속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이건 나에게 꽤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정도 휴가를 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갑자기 쉰다고 했는데도 받아준 팀이 정말 고맙지만, 그때는 앞뒤를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굳이  상태가 안 좋아진 몇 가지 이유를  꼽을 수는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봐도 뭔가 남 탓만 하게 되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항상 내 마음처럼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케팅을 하고 브랜딩을 하는 사람으로써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야 하는데 더 이상 “쓸 수 있는 마음”이 없는 상황이라는 건 굉장히 괴롭고 지치는 일이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주변에서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는데, 괜히 얕게 “힘내” 라고 하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뭔가 위로 비슷한 말을 듣는 순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라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다. 고맙기도 하지만 동시에 귀찮기도 해서, 뭐랄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아” 라고 말하고 싶어져 버린다. (아마 성격이 좀 더러운 탓인지도 모르지만요...) 그러니 그럴 때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한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고, 아무 것도 ‘입력’하려 하지 말고.


비행기표가 없어서, 대충 제일 빠른 날짜에 근처 가까운 도시였던 오카야마 행 티켓을 끊고, 어딘지도 모르고 내렸는데 "고라쿠엔"이라는 멋진 정원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라쿠엔. 일본에 몇 번 와봤지만, 아름다워서 충격을 받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신혼부부들이 기모노와 하오리를 입고 웨딩 사진을 곳곳에서 찍고 있더군요.



그래서 교토로 떠나왔다. (애초에 목적지였던 교토까지 도착하는 데는 출발하고 사흘이 걸렸지만.) 왜 교토인가 하면 별다른 이유는 없다. 약간 습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5년 전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오사카로 여행을 왔다가 반 나절 정도 머물렀었고, 2년 전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도 하루 정도 잠깐 머물렀었기 때문에, 뭔가 시작점으로 돌아간다는 느낌도 조금 있고. 어쨌든 현실에서 격리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일이 잘 되지 않고 사랑이 잘 되지 않는 데에도 별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잘 못 먹고 잘 못 자고 잘 못 쉬어서, 말하자면 리듬이 깨진 것이다. 마음을 쓰는 것에도 리듬이라는 것이 있다. 나처럼 감정적인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연료를 사용하는 것과 같아서, 채우지 않고 쓰기만 하다가는 연료가 다 떨어져서 요즘처럼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때로는 마음을 많이 쓰고, 때로는 덜 쓰고, 타이밍에 맞춰 다시 채워줘야 한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가끔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와 고민을 상담할 때가 있는데 – 그런 분위기에서는 일단 웃기고 보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별로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지만 - 이번에는 내가 의뢰인이 되어보기로 했다. “아무 것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일 아끼는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너를 좀 아끼라든지, 너를 좀 사랑하라든지 그런 벙벙한 말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동네 병원 의사 선생님이 감기에 걸려 찾아갈 때마다 나에게 해주는 말이 더 도움이 되겠지.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세요. 물 많이 드시고요. 괜찮아지면 운동도 좀 하시고.”


대여섯 개 정도의 차를 마셔봤는데, 이게 제일 씁니다. 음.. 역시 부(Rich)가 살아있는(生) 맛이란..


"사실 서울입니다" 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은 풍경이지만, 여기는 고베입니다. 교토에 간다면서 왜 고베냐고 물으신다면,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없기 때문이죠...후후


그래서 일본에 와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있다. 매일 만보 이상씩 걷고 있기도 하고. 하루 하루 별다른 목적 같은 것 없이, 그냥 아침에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마음 내키는 곳을 한 두군데 정도 돌고, 자판기가 눈에 보일 때마다 물을 한 통씩 사서 마시고 (마차, 녹차가 종류별로 있는데 정말 쓰지만 왠지 중독되는 맛입니다.) 저녁에는 숙소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낮잠을 자고 싶은 날은 낮잠을 잤다. 혹시나 해서 들고 온 노트북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첫 날에는 잠깐 들여다보긴 했다.) 책을 읽고, 걷고, 생각하고, 맛있는 걸 먹고, 잘 자면서, 그래서 답을 찾았는가 하면, 음...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여기로 떠나온 이유는 다시 사랑할 힘을 얻기 위해서, 뭔가 마음을 '리셋'하기 위해서 등등의 희망찬 것들이었는데, 들고 온 책에는 오히려 찬물을 끼얹듯이 이런 구절이 써 있었다.



회사나 조직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랑은 사랑의 시작과 동시에 눈을 멀게 만든다. 회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과 상관없는 인사 문제에 쓸데없이 간여하고, 그만 둔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고, 남아 있는 동료를 귀찮게 만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질리지도 않고 많은 것들을 소망해왔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내가 소망하더라도 신이 원치 않는다면 그 일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내 인생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중에서



여기에서야 말로 쓸데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일단 오늘은 글리코 상과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끊고, (오카야마, 고베, 교토를 지나 오사카로 왔습니다.) 나중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와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일본인 매장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아무리 친절해도 그렇게 일본어로 설명해주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하고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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