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돌아보며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을 굉장히 좋아한다. 군대에 있을 땐 그의 연설을 모아둔 책을 사서 밤마다 읽고 외울 정도였다. 정치적인 공과를 떠나서, 그의 연설은 듣는 사람들을 공감하게 만들고 감동시키는 메시지와 리듬감이 있었다. 그의 등장을 알렸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이나, <Yes, we can> 연설은 지금 봐도 전율을 주는 게 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연설이 있다면, 바로 2016년 11월 9일에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있었던 연설이다. 무게 잡고 힘 빡 주고 하는 연설이라기보다는 좀 더 편안한 기자간담회 같은 분위기에 가까운데, 그 이유는 바로 그로부터 몇 시간 전에 그의 후임 대통령이 트럼프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참모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개표방송을 보고, 준비했던 B 안을 들고 기자들을 만나러 왔을 것이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치를 태어나 처음 접한 어린 친구들에게, 아마 결과에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시니컬해지지 마세요. 우린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클린턴이 오늘 아침 이야기했듯이 옳은 것을 위해 싸우는 건 가치 있는 일입니다.
어쩔 땐 논쟁에 질 때도 있죠. 선거에 질 때도 있어요. 우리나라가 걸어온 길은 직선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그재그로 걸어왔고, 누군가 진보라고 믿는 방향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퇴보로 여겨졌죠. 괜찮습니다.
때로는 그게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그들은 투표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졌다면, 우리는 실수로부터 배우고, 반성을 하고, 상처로부터 회복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전장으로 나가면 됩니다. 한번 해 봅시다. 다음번엔 훨씬 더 많이 노력하면 됩니다."
"But to the young people who got into politics for the first time, and may be disappointed by the results, I just want you to know, you have to stay encouraged. Don’t get cynical. Don’t ever think you can’t make a difference. As Secretary Clinton said this morning, fighting for what is right is worth it.
Sometimes you lose an argument. Sometimes you lose an election. The path that this country has taken has never been a straight line. We zig and zag, and sometimes we move in ways that some people think is forward and others think is moving back. And that's okay.
That’s the way politics works sometimes. We try really hard to persuade people that we’re right. And then people vote. And then if we lose, we learn from our mistakes, we do some reflection, we lick our wounds, we brush ourselves off, we get back in the arena. We go at it. We try even harder the next time."
(영상 보기: President Obama speak on Trump presidential victory)
올해는 나에겐 정말 특별한 한 해였다. 벌써 세 번째 퇴사였지만 이렇게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참담한 패배감과 좌절감을 안고 나온 건 처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2년 반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배운 것도, 쌓은 것도, 얻은 것도 없이 소모되기만 했던 것 같다. 첫 단추부터 모든 게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회사에 처음 출근하면서 "나만 잘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만 잘해선 안 되는구나"를 배우고 마지막 퇴근을 했다.
그리고 네 달을 좀 넘게 아무 계획 없이 쉬었다. 우선 제일 오랜 시간을 보낼 환경을 바꿨다. 방 구조를 바꾸고, 침대도 바꾸고, 책장도 싹 갈아엎었다. 그리곤 여행도 다니고, 게임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실컷 놀았다. 처음엔 분노와 후회로 가득 차 있던 머리와 마음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비워져 가는 게 느껴졌다.
안 좋게 굳어진 몸과 마음의 습관을 고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필라테스를 처음 시작할 땐 올바른 자세로 가만히 서서 호흡만 해도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네 달 만에 새로운 팀에 합류해서 처음에는, 예전 직장에서 받은 트라우마들 때문에 쓸데없이 날카로워지거나 쉽게 포기하고 싶어지곤 했다. 우울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밀려가곤 했다.
다시 연말이 됐다. 나는 이제 내가 틀렸다 - 는 사실을,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으면서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못했던 게 맞다. 사람을 다루는 것부터 성과를 만드는 것까지 어느 하나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일들과 캘린더를 가득 채운 회의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나는 실패했다.
그리고 뭐, 괜찮다.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아레나로 나가면 된다. 예상과 다른 지점에 불시착하기는 했지만 엔진도, 기체도, 날개도 멀쩡하니까. 어쨌든 살아서 돌아왔다. "왜 그걸 버리고 나왔냐"라고 걱정해주던 친구들의 이야기는 처음엔 불필요한 오지랖처럼 거슬렸지만,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더 버릴 게 없다? 오히려 좋아."
리소스를 고려하지 않고 매일 쏟아지는 앞뒤 다른 오더들과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썩어 문드러져가던 시간은 이제 없다. 대신 이제는 내 손으로 손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현실감각을 되찾아 가고 있다.
브랜드란 무엇인가, 고객은 누구인가 - 와 같은 생산적인 고민들을 하고, 그 고민의 끝에 나온 몇 가지 가설들을 다음 날 실험해본다. 완전히 새로운 분야이지만, 하루하루 용기를 내서 꾸준하게 걸어 나간다. 내 시간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 그걸로 충분히 즐겁다.
정신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계속해서 진화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더 나은 선택들을 해 나가야지. 시니컬해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