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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서 록 Jun 07. 2024

건강한 성장통과 부잣집 도련님의 비행 그 사이 어딘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 리보's 북클럽 24.06.02

저번주 일요일, 교양 있는 현대인이 되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창업 학회를 2년 전에 같이 했던 언니가 자신이 운영하는 독서모임에 추가 인원을 모집했다. 마침 책을 강제로라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첫 번째이지만, 이 독서모임의 7번째 도서로 선정된 책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건데 그중에서도 제일 상태가 좋은 것을 고른 것이다. 제2판이더라...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책 제목을 보고 예상했던 내용은 목가적인 분위기에 넓은 챙 모자를 쓴 소년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양을 모는 그런 것이었다.(호밀밭이라며... 파수꾼이라며...) 그런데 이게 웬걸. 이 책은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가출하여 뉴욕 거리를 3일 동안 방황하는 이야기이다. 예상치 못한 내용에 당황하긴 했지만, 어린아이의 모험담을 읽는 마냥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책이었다.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이해는 되는


아무래도 영미권 문화가 배경으로 깔리다 보니 (내가 막 그렇게 유교걸까진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유교 사상이 디폴트로 내재되어 있는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가 홀든이 되어 그 속에 빠져드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학창 시절 집-학교-학원을 오갔던 1인으로서, 아무리 공부를 안 했다 하더라도 퇴학을 당했다고? 미성년자가 클럽에 간다고? 술을 마신다고? 성매매를 한다고? 6ㅇㅅㅇ??? 읽는 내내 이런 느낌...  보통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에는 책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데, 이런 영미권 고전 문학을 읽으면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내가 이 책에서 공감하지 못했던 또 다른 포인트 하나는 바로 홀든의 반사회적인 성격이다. 그는 줄곧 입에 발린 소리를 하거나 거짓 미소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싫다고 강하게 (물론 속으로) 표현하며, 자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정말 싫다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홀든의 이러한 표현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운명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인간에게 사회성은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비록 때로는 내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홀든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어른들의 사회적인 모습을 보면 역겹다고 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친해질 없을 것만 같은 유형의 사람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럴 수 있지' 끄덕였다. 그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어도 다들 성장 과정에서 한 번쯤 거쳐왔던 방황과 혼란의 시기. 그리고 그 시기를 담아내는 뉴욕이라는 배경.


내가 직접 뉴욕에 간 적은 없지만 주변 친구들 중에 뉴욕 여행을 갔다 온 후기들을 들어보면, 다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기대보단 이하였단다. 물론 MoMA 미술관, 뮤지컬, 맛집, 그리고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타임 스퀘어 등이 매력적인 곳들도 많지만, 더러운 지하철과 거리, 마약에 찌든 사람들과 걸인들로 인해 상상했던 것만큼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책의 배경이 뉴욕인 것도 물론 작가가 뉴욕에서 살았던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뉴욕이라는 도시가 본인 소설의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뉴욕의 화려한 도시 불빛 그 이면에 감춰진 골목골목들의 암흑이 남들은 본인의 길을 잘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반해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홀든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제목이 왜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인가?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이나 드라마를 볼 때도 가끔 느끼는 거지만, 책 제목이나 드라마 제목의 워딩은 실제로 책 내용이나 드라마 대사에서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 이 책에서도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말이 딱 한 번 나온다.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그 단 한 번으로 이 책의 내용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함축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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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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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이 되고 싶은 것이기 이전에 홀든에게 필요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자신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려 할 때, 또는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할 때 자신을 잡아주거나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자신이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고 한 것 같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홀든의 이름을 영어로 쓰면 Holden이다. 즉, 붙잡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 'hold'의 과거분사형(옛날식 표현으로, 현재는 문법상 held가 맞다)인데, 이는 파수꾼으로 쓰인 'catcher' 또한 붙잡다는 의미로 쓰인다. 홀든의 이름과 홀든의 장래희망을 통해 작가는 방황으로 빠지는 아이들을 붙잡아달라는 말을 하고자 한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존재는 누가 되어줄 수 있는가? 홈스쿨링을 하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므로 아마도 '선생님'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홀든이 설명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핵심은 떨어질 것 같을 때에 붙잡아주지만, 떨어질 것 같을 때에만 붙잡아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펼칠 수 있도록 놓아주되,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하면 바른 길로 인도해주어야 한다. 선이 어려운 같다. 선생님이 너무 아이를 이끌어주면 간섭이 되고, 또 홀든의 상황처럼 너무 풀어주면 방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독서 모임에는 직업이 선생님인 사람들이 무려 세 명이나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제로 자신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한다. 특히, 내년부터 고교학점제가 시행된다고 하는데(고등학교 졸업한 지 4년밖에 안 됐는데 참 많은 것이 바뀐듯하다), 고등학생들에게 대학에서처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간표를 짤 수 있는 자율성은 부여하면서, 본인들이 선택한 수업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장치는 마련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교에서는 해당 과목 수업을 잘 이수하지 못하면 교수님께서 낙제(F)를 줄 수 있지만,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고교학점제를 이수하는 아이들이 수업을 막 무단결석해도 3년 안에 정상적으로 졸업은 시켜줘야 한단다. 대학교에서는 본인이 학점을 잘 채우지 못했으면 5학년, 6학년까지도 가지만, 고교학점제에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몰랐지만, 크고 나서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말을 들어보니 우리나라 고등교육에 참 애로사항이 많은 것 같다. 대한민국 선생님들 모두 파이팅...




마지막 선은 넘지 않는


홀든은 학교를 퇴학당하고 집을 나와 뉴욕 거리를 방황하면서 미성년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펍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클럽에 가고, 매춘을 한다. 그런데 그는 클럽에 가서도 구석에서 혼자 사람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으며, 호텔로 부른 여자에게 돈을 주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다.


마지막 남은 양심인가? 아직 어린아이의 순수성이 남아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그냥 찐따라서 노는 법을 모르는 것인가? (나는 사실 3번째라고 보긴 했다) 방황을 하긴 하지만 마지막 선은 지킴으로써 오히려 현실성이 더욱 부여된 듯하다. 자칫 큰 파장과 논란을 일으킬 부분들을 어린아이의 호기심으로 대변할 수 있는 작가의 큰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홀든이 대부분의 과목에서는 낙제를 받았어도, 영어 과목에서만큼은 A를 받았다. 영어 작문을 쉽게 하고 책을 자주 읽는다는 부분에서 오히려 영어 과목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홀든이 갱생 불가의 처치곤란 금쪽이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본인의 좋아하는 것과 재능을 잘 갈고닦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줬다면 훌륭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게 대체 왜 고전 문학?


영미권 고전 문학을 읽을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성적인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절대. 심한 욕설과 외설적인 내용으로 인해 그 당시에도 논란이 많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게 어떻게 고전 문학으로 인정되는 것일까?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2024년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책이 발표된 1951년 미국에서 살던 사람들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문화상과 시대상에 공감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방황을 많이 했던 사람들은 홀든이라는 캐릭터를 응원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은 또 홀든을 신랄하게 나무랐을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빠와 까 모두를 미치게 하는 작품인 것이다. 


소설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음악을 비롯한 대부분의 예술이 그런 것 같다. 좋은 평만 받아서는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지 않는다. 혁신적이거나 신박하거나 새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논란이 되고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해야 역사에 남고 고전이 되나 보다. 




어른의 책임


소설 초반에 홀든은 친구 스트라드레이터의 부탁으로 그의 작문 과제를 대신해주게 된다. 홀든은 이때 백혈병으로 죽은 동생 앨리의 야구 글러브를 주제로 글을 쓰며 처음 앨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똑똑하고 착하고 빨간 머리에 왼손잡이었던 동생 앨리를 홀든은 정말 사랑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앨리가 죽은 날, 홀든은 그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차고 유리를 주먹으로 깨뜨렸다고 한다.


이 책의 전반에서 홀든은 앨리를 그리워한다. 앨리의 환상까지 보기도 한다. 홀든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변호사이고, 홀든이 전학에 전학을 거쳐 벌써 네 번째 기숙형 사립 고등학교 다니는 것을 보면 부유한 집안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집이 부유한 만큼 부모들의 부유한 관심은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동생 앨리의 죽음은 어린 홀든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텐데 당시 부모, 또는 주변 어른들을 비롯해 '호밀밭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그 상처를 미처 치유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홀든이 이렇게 아직도 동생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간에 갇혀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홀든이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에는 비단 어른들의 책임이 없지만은 않다. 아니,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아 홀든 콜필드의 3일간의 뉴욕 방황기. 다들 저마다 사정이 있고 상황이 있는 법이니 홀든을 이해하고 말고는 독자의 몫인 듯하다. 다만, 작가가 질풍노도 시기를 보내며 혼란스러워하는 청소년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서술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다.


미처 못 다룬 이야기가 많다. 홀든의 짝사랑녀 제인, 여사친 샐리,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정상인인 동생 피비, 'head'를 만진 안톨리니 선생님 등... 하지만 스테이크를 배불리 먹었으니 옆에 있는 가니쉬는 남겨두도록 하자.


이 책은 <노르웨이의 숲(또는 상실의 시대)> 저자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큰 영향을 끼쳐 그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고 한다. 마침 다음번 책이 <노르웨이의 숲>이어서 비교하며 읽으면 재밌을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무라카미 하루키뿐만 아니라 빌게이츠, 오바마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의 샤라웃을 받은 책이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마음 한 켠에 홀든 콜필드를 품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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