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돈도 없고, 시간은 더 없던 시절이 있었다. 월차도, 연차도 없던 곳에 다니던 나에게 주어진 꿀 같던 4일이라는 휴무(이 마저도 주말 포함이었다니). 너무 소중해서 악착같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가기엔 돈도, 시간도 다 여력이 되지 않던 내가 곰곰이 생각한 후 선택한 것이 바로 강릉여행이었다.
강릉에 대해 찾아보며 알게 되었다. 숙박비가 정말 비싼 곳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악착같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 나에게 숙박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법은 찾아내면 되는 법. 이리저리 고민하던 내가 선택한 방법은 무궁화호 밤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밤 10시 30분 기차를 타면 다음날 새벽 6시 30분에 강릉에 내려준다는 무궁화호. 이건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잠을 자면 되니 숙박비도 아끼고 1석 2조 아니겠는가.
이런 창대한 계획을 세운 후 뿌듯한 마음으로 내 여행 계획을 친구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내가 '무궁화호 밤기차' 까지만 듣고서 나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역마다 서는 그 기차를 타고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가면 강릉에서 돌아다닐 체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냥 숙소를 잡으라고!" 등의 말을 들었다. 그때 슬그머니 나를 찌르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래서 언제 갈 껀데?'
며칠 뒤, 이 친구랑 강릉 가는 약 10시간짜리 무궁화호 밤기차를 탔다.
대관령 가는 길에 봤던 표지판
다수의 사람들이 말리는 일이 있다면 다시 한번 신중하게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말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정말... 밤기차를 타고 가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무궁화호가 많은 역에 정차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많은 곳에 서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산을 첫 승차역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종착역인 강릉까지 가는 길. 30분-1시간마다 칼같이 기차는 섰고, 기차 안에 불이 켜졌다. 잠을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것 같은 가수면 상태가 지속되었다. 앉아만 있는데도 체력이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그때 우리 눈 앞에 정동진 일출이 나타났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무려 정동진의 일출을 보는 건 정말 짜릿했다. 일출을 보는데 체력이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탄 기차는 정동진을 지나 강릉에 도착했다.
차도 없는 우리의 강릉여행은 꽤나 빡세고 힘들었다. 강릉의 시내버스는 잘 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쳐 택시를 타려고 했으나 택시조차 잘 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10월이었는데도 위쪽 지방이라 그런지 너무 추웠고, 나는 맨다리에 치마를 입고 있었다. 참다참다 검은스타킹을 사겠다고 온 시장을 돌았는데 검은스타킹을 사지 못했다. 대체안으로 커피색 스타킹을 사서 신었다. 겨우 탄 시내버스인데 잘못 내려 한참을 걷기도 했고, 길이 아닌 곳에 들어 숲을 헤치며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굴하지 않았다. 새벽 6시 30분부터 막차시간인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돌아갈 때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 시외버스를 탔다. 혹여나 버스를 놓칠까 1시간 전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앉아 있다가 이상한 사람이 돌아다니길래 무서워서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고 앉자마자 친구는 "아휴. 드디어 여행 끝났네."라고 말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내 말에 홀랑 넘어가 같이 여행을 가면 사서고생하다가 집에 온다는 말. 내가 친구를 너무 고생시킨 건 아닌가 싶어 물었다. "오늘 너무 빡셌나?" 그러자 친구가 대답한다. "아니! 하여간 매번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강릉을 무박 2일로 여행할 생각을 해! 다음에 또 가자." 그 말을 들으며 오늘이 고생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겁쟁이가 되기 전까지
계속 사서고생을 해볼까나
내 여행은 항상 즉흥적이고 급작스러운 경우가 많다. 계획을 세우고 찬찬히 가기보다는 '나는 지금 여행삘이 왔고 지금 간다!'라는 식으로 여행을 가기 때문이다. 필리핀 어학연수를 혼자 알아보고 다녀왔을 때도 그랬고, 배 타고 당일치기 대마도 여행을 갔다 왔을 때도 그랬고, 갑자기 큐브호텔을 잡고 서울에서 지내다 왔을 때도 그랬다.
그랬던 내가, 이런 즉흥여행이 아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까운 옆 도시를 가는 것도 주춤하게 되고, 아무 계획 없이 목적지만 갖고 가는 해외여행은 더더욱 무섭다. 이제는 나도 몸 편하게 좋고, 잠만큼은 꼭 편한 데서 자고 싶다.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면 꼭 그때 그 시절 여행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그때 참 고생했었다고, 남들은 편하게 가는 길도 굳이 걸어 다녔다고 얘기하며 웃는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사서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그러고는 나를 보며 묻는다.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 건데?" 그 말을 듣는 나는 손사래를 친다. 이제 여행 안 갈 거라고. 누가 뭐래도 집이 최고라고. 그렇게 대화를 나눈 후 집에 와서 생각한다. 사람은 힘들 때 버티게 하는 것이 과거의 좋은 추억들이라고 하는데, 내가 했던 사서고생들이 사실 좋은 추억들이 된 것 같다고. 여행을 마치고 매번 집에서 짐을 풀 때마다 '이제 집에만 있을 거야! 어디 안 가!'라고 하면서도 또 어딘가를 가는 건 힘듬보다 더 좋은 게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엄마가 내 여행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하시는 "아직 청춘이다!"라는 말에 따라 더 겁쟁이가 되기 전까지 계속 사서고생 여행을 해보려고 한다. 원래는 여행은 사서고생하는 게 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