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보내는 여행기(낙양 용문석굴, 관림)
사람의 습관이 대단한 것 같아. 시차가 단지 1시간밖에 나지 않고 오전 6시에 맞춰진 핸드폰 알람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도 내 속의 시계는 일어나라고 채근질이네. 일어나서 무심결에 확인하는 핸드폰 시간은 이제 5시가 갓 넘은 시간이야. 다시 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한국시간으로 기상시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일어나 앉아. 곧 중늙은이가 되는 건 아닌지…
샤워를 하고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동네 산책도 하고 아침식사도 할 겸, 밖으로 나갔어. 여행을 하면 당신과 아이들이 아침잠을 자고 있을 때 혼자 나가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언제나와 같은 루틴이지. 사람이 많은 중국도 아침 모습은 한가하더라. 어젯밤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들어갔는지, 조용한 아침 거리가 신기할 정도였어. 큰길에서 낙읍고성(洛邑古城)방향으로 산책을 하다가 숙소 방향으로 돌아왔더니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들이 하나씩 문을 열리 시작했어.
만두가게, 죽집, 간단한 국숫집, 두유과 튀김빵을 파는 식당들. 숙소 바로 앞, 노천 만두가게가 가장 끌리기는 했지만 오늘 아침은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유차(油茶)와 만두를 파는 식당으로 결정했어. 언젠가 TV에서 본 적이 있는 음식인데, 기름과 땅콩을 섞어 만든 밀가루 죽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옆 테이블을 봤더니 유차는 일반적으로 간단한 튀김(果子)을 얹어서 먹거나 꽈배기 모양의 요티아오(油条)나 만두(包子)를 곁들여 먹고 있었어.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주문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튀김을 곁들인 땅콩유차(花生果子油茶)와 고기만두 그리고 야채만두를 주문했어.
유차는 사실 특별한 맛은 아니었던 것 같아. 김장할 때 사용하는 찹쌀풀에 기름과 땅콩가루를 넣은 맛이랄까. 유차에 얹혀진 튀김은 유차의 심심함을 잡아주는 역할 정도. 슴슴한 맛이 가벼운 아침식사로 나쁘지 않았고 만두와의 조화가 좋아서 만두만 먹을 때의 목 막힘을 부드러운 유차가 잡아주더라. 아주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부담 없고 가벼운 아침식사로 적당한 음식조합이었어. 이곳 사람들은 아침식사로 유차와 만두를 많이들 먹고 있었어. 가격은 유차와 만두를 포함 9.5위안(1,850원).
뤄양에서의 실질적 첫 방문지는 용문석굴이야. 뤄양을 흐르는 강인 이수의 강변 돌산에 수천 개의 석굴을 만들어 불상을 모신 유적이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비, 관우, 장비의 시대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당나라시대에 대부분이 완성된 석굴이야. 많은 석굴들이 조성되어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소고기 천엽 조각을 보는 것 같아.
수 없이 많은 석굴 속 불상 중에서도 가장 크고 인상 깊은 것은 로사나불과 로사나불을 호위하는 천왕상이었어. 로사나불은 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해. 중국의 서쪽 불상들의 얼굴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불상의 얼굴과는 조금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어. 특히,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떴다는 로사나불의 얼굴은 더욱 그런것 같아. 동양인의 얼굴과 함께 서양풍의 얼굴이 보인다는 점이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코도 오뚝해서 서양의 얼굴은 아닐지 몰라도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보이더라. 로사나불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천왕상은 특유의 우화적인 모습과 석굴에서 지금이라도 걸어 나올듯한 역동감을 느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어. 근엄한 로사나불보다 역동적이고 입체적 느낌의 천왕상의 모습이 나중에 까지 기억에 남더라고.
석굴들이 밀집해 있는 서측의 석산을 뒤로하고 이수를 건너 동측석굴로 건너갔어. 이미 땡볕에 땀을 흘릴만큼 흘렸는데 낑낑거리며 다시 석산을 따라 언덕을 올랐지만 이수 건너편 서측 석굴만큼 크고 웅장한 불상은 없었어. 하지만 땀을 닦고 뒤를 돌아보면 로사나불을 중심으로 서측의 석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져서 물 한 모금으로 더위를 식히며 한참 동안 망중한을 즐겼어. 산을 내려와서 동쪽 이수강변을 거닐면서도 서측의 석굴을 바라보며 경이로운 유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인간이란 참 대단해. 그리고, 인간의 권력이란 더 대단해'라는 생각이 들더라.
용문석굴 외에도 이수의 동편에는 향산사라는 사찰이 있어. 이 사찰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와 중국 국민당 주석 장개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야. 향산사에 도착할 즈음에는 오전부터 찌는 듯한 더위와 수많은 인파에 시달려서 사찰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더라고. 향산사를 대충 둘러보고 언덕배기를 내려와서 좀 쉬기도 하고 점심도 먹을 겸 식당을 찾았어. 주변 식당을 둘러보다가 용지면(龙之面)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식당을 찾았어. 워낙 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식당명을 보자마자 들어갔어.
식당 메뉴를 둘러보니 몇가지 면종류와 간단한 반찬을 파는, 식당규모에 비해 단촐한 메뉴를 가진 식당이었어. 대표적인 면종류는 용지면(龙之面)이라는 해물탕면과 몇 가지 고기탕면 종류와 유포면(油泼面)이 있었어. 나는 책과 SNS에서 본 적이 있는 유포면을 주문하고 반찬으로는 산두부피(涮豆腐皮)를 주문했어. 유포면은 널찍한 밀가루면에 숙주와 파 그리고 끓은 고추기름을 부어서 비벼 먹는 면이야. 아주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한국사람에게 특별한 거부감은 없을 것 같았고, 시안에서 먹었던 뺭뺭면보다 훨씬 더 맛있었어. 반찬이라는 표현보다는 사이드 메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듯한 산두부피(涮豆腐皮)는 내가 집에서 가끔 만드는 건두부볶음과 비슷한 맛이야. 산(涮, shuan)이라는 한자는 "데치다"라는 의미의 중국어야. 뜻 그대로 데친 두부피로 만든 음식이야. 실제 이 음식은 데친 건두부를 꼬치에 꽂아서 고추기름을 얹어서 조리한 것으로 보여. 우리 가족에게는 익숙한 모습과 예상되는 맛을 가진 음식일 거야.
점심식사와 함께 더위를 피해 숨을 좀 돌리고 관우의 무덤 관림(关林)으로 출발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에서 유비의 아우로, 긴 수염과 대추빛 얼굴로 중국천하를 호령하던 미염장군 관우. 바로 그 관우의 무덤이야. 관우의 무덤은 중국 내에 모두 3곳이 있어.
위촉오 삼국이 천하삼분지계로 분할된 이후, 관우는 손권이 이끄는 오나라의 장수 여몽에게 죽임을 당해. 손권은 촉나라 유비의 보복이 집중되는 것이 두려워 관우의 목을 베고 그 목을 조조에게 보내. 조조는 관우를 존경하는 마음과 손권의 책략을 견제하고 유비의 보복에 대응하기 위해 관우의 목에 나무시신을 만들어 장사 지내. 조조는 당시 위나라의 수도였던 이 곳 낙양에 관우의 무덤을 만들게 되는데 그 관우의 무덤이 여기 관림(关林)이야. 목이 없는 관우의 몸은 손권에 의해 장사 지내져 후베이 성에 관능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고, 관우의 고향에는 관우의 또 다른 시신 없는 무덤이 있어. 이 외에도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중국 곳곳에 수 백 곳이 있다고 해. 이렇게 관우의 무덤과 사당이 많은 것은 그만큼 중국인들이 관우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일 거야.
관우의 사당에는 관우상이 있고 관우의 좌우를 지키는 두 장군이 있어. 좌측을 지키는 장군은 관운장의 아들 관평이고, 험상궂고 시커먼 얼굴의 장군이 주창이야. 말년의 관우를 보위하던 측근으로 대부분의 사당에서 관우와 함께 볼 수 있어. 관우의 사당이 우화적인 분위기인 것은 관우가 도교의 신들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야. 도교의 신 중에서도 관우는 재물신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이 된 거지. 삼국지연의에서의 의리를 숭상하는 관우의 모습과 재물신으로 알려진 도교적 이미지 때문에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아.
다음 일정은 관림에서 우연히 만난 과천의 교감선생님 부부와 함께한 주천자 가육박물관이야. 이 박물관은 춘추전국시대 이전,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은·주시대의 마지막 국가인 주나라 천자의 묘를 발굴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야. 낙양을 도읍으로 삼은 최초의 국가가 바로 이 주나라야. 주천자의 묘도 낙양의 한 복판에 형성되어 있어. 고대 천자의 무덤이라는 것 외에도 이곳이 아주 특별한 이유는 바로 순장묘라는 점이야. 주나라 천자는 6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이용했고, 수레를 끄는 말의 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어. 천자의 묘를 발굴한 이 박물관에서는 문자가 아닌 눈으로 순장을 목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어. 지금부터 약 2500여 년 전의 무덤을 눈으로 보는거지.
37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인데 들뜬 기분에 무리를 한 것 같아. 숙소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눈을 좀 부쳤어. 한숨 자고 일어나니 두통도 사라지고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아. 근처에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 쉴까 하다가 사위가 어둑해질 즈음, 숙소에서 가까운 여경문(丽景门)으로 산책 삼아 방향을 잡았어.
여경문은 낙양에서 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닐까 싶어. 그리고 야시장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저녁식사하고 산책 삼아 오기에 좋은 곳이더라. 여경문 성벽에 오르면 낙양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낙양을 첫 도읍지로 삼았던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위진남북조, 수, 당의 중국 역사를 도표형식으로 간략하게 볼 수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한 시간 넘게 짧은 중국어와 번역기를 이용해서 도표와 설명을 읽어 나갔어. 이 중에서도 관심이 갔던 부분은 공자가 존경에 마지않던 주나라 주공에 관한 이야기, 위나라 조조에 관련된 글, 당나라 측천무후에 관한 이야기, 당현종과 양귀비 그리고 안록산의 난 같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들이 많아서 흥미로웠어. 여경문과 이어진 야시장을 거쳐 카페에서 국화차 한 잔을 주문하고 낙양에서의 첫째 날을 마감해. 덥고 길었지만 즐거운 하루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