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품평. 보통 물건이나 작품의 좋고 나쁨을 평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 하지만 내가 이 품평이란 단어의 대상이 된지는 참 오래다.
대학에선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회사에선 동료나 상사들이 항상 내게 조언하듯 얘기했다.
넌 이것만 고치면 예쁠텐데
넌 이것만 참고하면 더 나아질텐데
넌 이것만 하면 남자들에게 더 인기가 많을 텐데
마치 가게에서 장난감을 고르는 아이들의 대화같았다. 마치 어떤 기능 때문에, 어떤 점들 때문에 내가 '개선'될 수 있을 것처럼. ‘이런 조건만 너가 더 갖추고 있으면 내가 널 살텐데’ 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내 자신을 가판대에 놓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부터 난 항상 그런 문화들에 둘러쌓여 있었다. 주위 여자아이들의 외모 순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톡방이 있었고, 특정 여자들을 언급하는 음담패설로 가득한 술자리가 있었다. 또한 여자로써의 매력에 대해 조언하는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이,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니 빨리 시집이나 잘 가라’며 질 나쁜 농담이나 던지던 윗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여러번, 내 기준이 아닌 남의 기준에 의해 재단되고, 밟히고 부서지고 있었다. 내가 보이는 곳에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도 말이다. 이런 문화에 익숙해진다는 건 정말 서글픈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뎌지는 내 자신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다 널 위해서 이야기해주는거야.
그들은 날 위한다고 했다. 그들의 '조언'을 들으면 내가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그들의 기준에 날 맞추면서 살아가면 난 남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날 위한다고 하는 말들이지만 정작 그 안엔 전혀, 날 위한 것들은 없었다는 걸.
너가 좀 더 애교가 있으면 (내가 기분이 좋을텐데)
너가 좀 더 조신하게 행동하면 (내 말을 더 잘 들을 텐데)
너가 더 자주 치마를 입으면 (내 눈이 즐거울텐데)
너가 이것만 좀 고치면 (내가 좋아할만한 기준에 들텐데)
나는 치마보단 바지를 입었을 때 편하다던지, 나는 굳이 애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무뚝뚝한 성격이라던지, 난 내 자신 그대로가 좋은 사람이며 이런 모습 그대로 날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던지 등의 내 생각들은 그들의 기준에 전혀 참고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들에게 상품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아닌, 흠집 하나 나지 않고 항상 예쁨 받을 수 있게 준비되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였다. 내 자신의 장점을 믿고 무엇을 사랑할지,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잘 아는 사람이였다. 하지만 남들의 평가에 다듬어지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후부터 나는 뭔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밖에서 안으로 전해지던 말들은 점차 내 안의 메아리로 변했고 끝내 내 자신마저 되뇌이게 되었다. 그렇게 내 자존감은 점점 소멸되었고, 나는 더이상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
당신의 삶이 아니라.
안물 안궁. 말 그대로,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 내게 어떤 기준을 들이대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생각들을 내 앞에서 더 이상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애초부터 물어본 적 없다. 나는 당신의 입맛에 드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태어난 도구가 아니다.
아무리 당신이 작은 조약돌을 던졌다고 생각해도, 그 돌을 맞아 생긴 흉터가 나중에 길이 길이 남을 인생 교훈이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해도. 그걸 매일 맞는 사람의 입장을 한번쯤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발, 품평하는 것을 삶의 재미로 여기는 사람은 역지사지의 입장을 갖춤과 동시에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그 습관부터 버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이 생각하는 것 처럼 내 자신이 못났고, 부족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게 이젠 내게 신경을 꺼주는 것과 동시에 같이 당신의 존재도 같이 내 앞에서 꺼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