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의 하루

스페인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아무것도 안하기

by 정지은 Jean



너같은 겨울형 인간이 스페인을 갔다고?

한국에 있던 친구들은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내 결정에 대해 굉장히 놀라했다. 참고로 내가 제일 애정하는 가전제품은 에어컨이며, 난 몸과 몸이 맞닿는 부분 (겨드랑이, 무릎 뒤, 엉덩이 골 등)에 땀이 맺히지 않을 정도의 쾌적함을 항상 선호하던 인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반기는 바르셀로나의 찝찔한 햇빛에, 짜증 대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우면 뭐 어때? 그래도 바르셀로난데.



5월 초, 바르셀로네타 해변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바다다! 어딜 봐도 바다야! 같은 느낌이랄까. 아직 완전한 성수기가 오지 않았는데도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저렇게 쪽쪽대도 나중엔 더위 때문에 짜증나서 헤어질 커플들, 엄마를 나중에 빡치게 할 생각에 신나하며 모래를 호주머니에 모으는 아이들, 흡사 누드비치인줄 착각하게 만든 남사스러운 복장의 조깅 청년들까지...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일상의 평화로움... 보단 인생은 실전이야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였다.


가끔 여행을 하다 보면 '여기 오면서 이런 기본적인 걸 안 챙겼어?'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꼭 한명씩 있다. 그게 바로 나다.


예시 ) 바다 가는데 수영복 안챙겨서 결국 바다 근처에서 싼맛에 하나 사서 입어놓곤 집에 돌아와서 빨래 돌렸는데 어쩐지 싼게 비지떡이라더니 색깔이 죽죽 빠져서 다른 빨래도 다 망쳐버리는 사람, 등산을 가면서 물 안챙겨서 주위 사람들한테 한입만 시전하다가 결국 등짝 맞고 정상에서 시중가 세배 를 친 가격에 얼음물을 사는 사람.


난 이런 종류의 인간인지라 항상 관광지에 갈 때마다 사지 않아도 될 것들을 사며 여행 경비를 낭비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상인들에게는 난 참 괜찮은 호갱이였는지도.


고의였는지 우연이였는진 모르겠지만, 카펫을 파는 상인이 지나가며 계속 카펫으로 내 따귀를 때렸는데 그 감촉이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그렇다. 나는 변태였던 것이다... 가 아니라! 하마터면 카펫상인의 고도화된 판매전략에 말려들 뻔 했다. 같이 간 친구들과 나는 한번만 더 뺨에 저 카펫이 닿으면 일시불로 사버릴 것 같다며 황급히 뺨들을 숨겼다.



이렇게 보니까 사람 안 많아 보이는데 사실 엄청 많았음, 잘생긴 사람도 많았음, 내 사심도 많았음



그러고보니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차별화 사업의 메카였다. 일단 해변을 돌아다니는 안마사들부터가 기존의 안마사들과는 달랐다. 평소 미지의 분야에 개척정신이 강했던 한 친구는 안마를 경험해보기로 결심했다. 안마사를 부르자 어디선가 휙 하고 튀어나왔다. 숨쉬듯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등장, 그때부터 이 안마사가 뭔가 범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친구는 영어가 통하지 않았던 안마사에게 어떤 안마를 원하는지 바디랭귀지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안마사는 그에 대한 답례로 어마어마한 바디 마사지를 선사했다. 그것은... 안마라기 보단 아크로바틱의 경지에 가까웠다. 2PM의 레전드 데뷔곡, 10점 만점에 10점에서 박재범의 공중제비를 처음 접했던 내 심정도 이보다 더 경이롭진 않았을 것이다. (경이로움에 안마 사진도 찍었는데 너무나 굉장한 포즈라 차마 올릴 수가 없다.)


두 발로 땅에 서서 안마를 하는 건 안마사로써 근무 태만이야!!! 라고 외치는 듯한 그녀의 몸짓에선 안마사 외길 인생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철한 직업정신이 돋보였다. 안마 보다는 현란한 비보이 공연에 가까웠던 그녀의 혼이 농축된 안마는 정말 색다른 의미로 소름 돋았다.



바르셀로네타 해변 가는 길, 이 주위 어디서 먹으면 입에서 똥내나는 염소 치즈 파스타로 점심을 때웠다.



어느 정도 충분히 바다 분위기를 만끽했다는 생각이 들자 (어디서? 안마에서?) 이 해변가에 온 본격적인 목적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기승전 ’술’ 마시기. 사실 우린 해변에 들어오기 전 미리 근처 상점에서 얼음과 만들어진 모히또 한 병을 샀다, 큰 병으로다가. 민트잎같은 다른 재료들을 사는 건 생략했다. 이유는 뭐냐? 귀찮으니까.


얼음이 녹을 새라 햇빛에 닿지 않도록 옷으로 싸매면서까지 케어했는데... 결국 녹여서 못 쓴 얼음보다 비글짓 하다가 모래사장에 쏟아버린 얼음이 훨씬 많았다. 방심의 아이콘인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밖에서는 안 잃어버리는 교통카드를 항상 방 구석에서 잃어버리곤 못찾아서 새 교통카드를 산다던가... 이사갈 때마다 짐 정리 하면 교통카드 한뭉텅이가 나와서 아주 티머니 재벌이 따로없다며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많이 맞곤 했다.



찾았당! 먹고 나면 입에서 똥내나는 염소치즈 파스타 사진!



사실 여기서도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실로 대단한 차별화 사업 전략이 돋보였다. 스페인하면 단연 먼저 떠오르는 음료는 샹그리아 임에도 불구하고, 해변을 서성이는 상인들은 죄다 모히또를 팔고 있었다. 스페인에 와서 모히또 마실 생각은 못했지?? 이건 어떠냐!! 같은 파워 자신만만한 표정과 함께.


스페인에서 샹그리아 대신 모히또라니. 마치 서울에서 C1 소주 찾는 것과 같은 찝찔함이 남았지만 일단 친구들과 즉석으로 만든 모히또를 들이켰다. 들이키고 나니 왜 상인들이 모히또를 파는 지 그 마음이 백번 이해가 갔다. 그리고 이병헌의 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이해하지 못했다.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 잔? 모히또에서 바르셀로나 한 잔에 비하면 쨉도 안된다.


모히또의 무서운 점은 음료수 같은 맛에 한 두잔 들이키다 훅 간다는 것이다. 난 사실 술에 취향이 있다기 보단 그냥 취하는 거면 다 좋다. 인생 뭐 있나. 술 취하면 드러눕고 자는거지. (그래도 가방은 꼭 안고 자야한다. 유럽에선 자나깨나 소매치기 조심.)



모히또에서 바르셀로나 한 잔 하실래예? 엇 이병헌이 아니라 로버트 할리가 되어버렸어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선글라스는 필수다. 술취하면 나른하고. 나른하면 눕고싶고. 그런데 눕자니 햇빛이 정통으로 내 눈을 때리고. 요럴 땐 어떻게 하느냐, 겨울 내내 옷장 안에 쟁여놨던 선글라스를 꺼내면 된다.


옷장 속 먼지 대신 옷장 밖 미세먼지를 한껏 머금은 내 썬구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쮸쮸 언니가 한눈에 반해서 데려와 놓고 소홀해서 삐졋징" 이라며 녀석을 다독였다. 그래. 선글라스랑 대화를 하다니, 이제 와서 보니 내가 취했었다. 좀 많이.


술은 이래서 마시나 보다. 그냥 드러누워만 있어도 뭔가 나른하고 행복하니까. 지금 알콜이 내 뇌를 속이고, 이 상태가 내 뇌세포의 파괴를 가속시키고, 이런 생활을 평생 계속 하면 알콜성 치매가 올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난 글을 못쓰게 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항상 다시 술을 마실 수 있는 기발한 변명을 생각해낸다. 나는 어떤 핑계를 대볼까 하다가 누군가가 해줬던 모히또 이야기가 뙇 떠올랐다. 모히또 재료의 성분이 괴혈병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쓰였다는 이야기. 그렇게 난 "나는 약을 먹고 있는거야! 평생 안걸릴 것 같은 괴혈병을 미리 치료하고 있는거라고!" 라며 계속 마셨다. 사실 딱히 기원 이야기 안 떠올랐어도 계속 마실 예정이였지만서도.



잘 먹고 잘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 흐트러진 정신만큼 사진도 흐트러짐.


딱 하루, 하루여서 좋았다.


그때의 난, 딱 이런 하루가 필요했었다. 과제니 뭐니, 내 취업이니 뭐니. 여유롭게 살기 위해 여유를 포기해야 하는 세상에서 난 계속 달리고 있었다. 뭔가에 뒤쫓기는 것 같은 불안감과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 삶이 어디로 가는지도 사실 잘 몰랐다. 그저 주위 사람들에게 파묻혀 방향따윈 모른 채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릴 뿐. 그런 타이밍에 떠난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마주했던 사람들의 여유로움은 내겐 충격적이였다.


"내가 하루종일 이렇게 아무것도 안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구나" 라며 정말 신기해할만큼. 그 날의 나는 해변에서 드러누워 있는 것 빼곤 아무 일정도, 뭘 해야되겠단 생각도 딱히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사실 놀라운 일이였다. 매일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려고 달려왔던 내게 이런 의미 없는 하루가 내 인생에 큰 의미로 자리잡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을 하고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이 바르셀로네타 해변이였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발전 없이 하루를 보낸 난, 분명 난 그 때 남들보다 뒤쳐지고 있었을 텐데. 어쩜 그렇게 행복했을까.


이런 생각들은 점차 영국에 살고자 한 내 결정에 대한 자극과 동기 그리고 아주 큰 용기가 되어줬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 조금 여유 부려도 괜찮다는 생각들을 하다보니 점차 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가끔 놀고 먹는게 죄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기에 난 내년 여름이 돌아오면 다시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돌아가 딱 하루,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먹을 생각이다. 이번엔 모히또를 두 병 사가야 겠다. 저번엔 약간 모자라서 아쉬웠으니까. 그것 빼곤 아무 생각이 없다 지금은. 이젠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5월 초,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쓴 글을 참조하여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