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에 찬 내 과거와 화해하며
초두에 이 시리즈의 사용법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그리고 이 시리즈 전체를 유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내가 겪었을 세계관의 혼돈에 공감했을 수 있다.
특히나 장로교 교인이거나 칼뱅주의 계열의 신학을 배웠거나 성서 주해보다 교리, 교의학, 조직 신학에 익숙한 신학도라면 반발심 마저 불러 일으켰으리라.
하지만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끝내 오듯,
진실이 파편으로 존재한다는 진실 역시 그것을 파헤치는 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올 뿐이다.
정경의 통일성,
성서 각 권의 통일성,
장 대 장/절 대 절의 연속성이라는 것은 철저히 사후에 부과된,
비본래적 해석물이라는 진실.
해석자여,
당신은 신화를 신화로 대하고,
문학을 문학으로 대하며,
사실을 사실로 대하고,
가치를 가치로 대하는 일의 난해성에 관하여 눈 떴는가?
히브리어/헬라어를 마스터하고 모든 종류의 고대어 사전을 뒤지더라도,
고고학적인 학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스올", "엘로힘"과 단어의 의미를 결정할 수 없으며,
그 학설들 역시 설명력이 동등하면 그 사이에서의 결정은 엄밀성이 아닌 해석자의 선입견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실재하는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토마스 쿤 같은 물리학도 역시 뉴턴이나 갈릴레이의 1차 문헌의 많은 부분을 한 큐에 이해할 수 없었음을 유념해 보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사원소설 같은 과거 세계관 안에서 쓰인 문헌들이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신학도들이여,
비슷한 해석의 문제가 성서 각 장 간에 존재하고, 해석과 교리의 일관성 문제가 로마 제국 이후 모든 교회사의 각 시대에 존재함을 알고 있지 않은가?
달력과 지도를 벗어나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신앙이 당신이라는 존재로부터 투사된 것이기에 더 가치롭다고 느껴볼 생각은 없는가?
해석자여,
나는 5년 전,
내 신앙을 거세하고 반사실적 현실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으며,
지금도 진행중인 이 여정의 도상에서 당신에게 말한다.
해석자여,
진리는 당신 외부에서 왔을지라도 당신을 통해 다시 발출되는 동안 변성되는 물질인 것이다.
그 사실이 당신을 슬프게 한다면,
나의 미소띤 부처 같은 광휘를 꼬나보라.
나는 나의 지성소에서 찢겨 나간
하나님의 진리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조소한다.
나는 나를 놓아준 내 칼뱅주의 야훼에게
매일 감사 기도를 올린다.
그는 나에게서 진리를 앗아간 대신
진리의 속성을 가르쳐주었다.
진리의 파수꾼 자격을 박탈 당한 뒤
나는 내 진리의 창조주가 되었다.
진리를 떠들고 총을 잘 쏘는 것.
이 페르시안 도덕률이 나의 새로운 신앙이다.
해석자여,
나를 이해하였는가?
해석자여,
당신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가.
성서를 탐험하며
기꺼이 진리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다짐한 해석자여,
이 여행이 한낱 유희 거리에 불과하며
기꺼이 즐겨야 할 여정에 불과함을 이해하였는가.
해석자여,
Bon Voyage.
당신의 반사실적 여행을 위해 내가 축성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