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A 2:4b-9 - 아직 땅이 허전했을 때, 하나님이 땅을 가꿀 사람과 하나님과 천사들(하나님의 천상 공동체)이 사는 신적인 정원(에덴 동산)을 각각 만드시고, 사람이 이 정원 안에 들어와 함께 살도록 하시다.
B 신적인 정원 안에서의 삶
2:10-14 – 에덴과 정원으로부터 강이 흘러나와 온 땅(동서남북)에 생명을 전하다.
2:15-17 - 하나님이 사람을 이 정원에서 봉사하도록 하시고, 먹어도 되는 과일과 먹어서는 안 되는 과일(선악과)을 정해주시며, 이에 대한 침범을 엄벌(사형)로써 경고하시다.
2:18-23 - 하나님이 사람(남자)에게 아내(여자)를 조력자로 주시고, 아담이 하나님이 지으신 미물들에게 이름을 하사하다.
2:24-25 - 부모로부터의 독립과 혼인이 인간적인 삶으로 일반화되다. 최초의 부부가 헐벗은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다.
B' 사람이 더 높은 삶을 탐하다
3:1-7 - 부부가 뱀에게 놀아나 금지된 과일을 범하다.
3:8-13 - 하나님이 영-바람으로써 강림하시어, 뱀과 부부의 범죄를 심문하시다.
3:14-19 - 하나님이 뱀과 부부의 범죄에 대해 판결하시다.
3:20-21 -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새로 지어주고, 하나님이 부부에게 동물의 가죽을 입히시다.
A' 3:22-14 - 하나님이 사람 부부를 생명나무가 있는 하나님의 정원(영원한 삶)에서 쫓아내고 허전한 땅을 가꾸게 하시다.
1) 본문이 설정하는 시간적인 흐름에 관하여: 창세기 2장의 창조순서(땅 → 남자 → 정원 → 동물 → 여자)는 창세기 1장의 것(땅 → 식물세계 → 동물 → 남자와 여자)과 상이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본문 중 어느 본문의 관점이 더 사실적인 묘사인지(다시 말해, 어느 순서가 실제 원시세계의 변화과정과 일치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비록 1장의 ‘계보’가 그 성격상 연대기적 서술로부터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2장의 순서도 ‘나름대로’의 서사를 제시할 뿐, 이 관점은 연대기적 역사서술과는 전혀 무관하다.
2) 본문이 설정하는 공간적인 구조에 관하여: 창세기 1장은 마치 지상이 일순간에 식물세계로 충만해진 것처럼 묘사하지만, 2장은 원시적인 지상세계 전체는 매우 허전했으나 그 가운데 건설된 하나님의 정원만이 비옥한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묘사한다.
또한 본문은 ‘에덴’과 에덴에 있는 ‘동산(정원)’을 구분한다. ‘동산’은 ‘동방의 에덴’이라는 지역에 조성됐으며(2:8), ‘에덴’에서 흘러나온 강은 ‘동산’을 거쳐 네 줄기로 갈라진다(2:10).
본문은 이 ‘네 줄기의 강’을 실제 지명과 연결하지만(2:11-14), 불행하게도 이 지명들이 우리가 가진 지도와 성공적으로 조화를 이룰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단, 14절의 “힛데겔티그리스”과 “유브라데유프라테스”는 예외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은 지리적 정보를 습득할 때, 우리처럼 기하학적 단위나 과학적인 관측도구(예컨대 위도/경도나 인공위성 등)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차이가 우리가 본문의 핵심을 읽어내는 데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것 같다.
3) 2장 9절은 동산 중앙에 ‘두 그루의 신성한 나무(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고 묘사하고, 이 ‘두 나무’ 중 금지된 나무는 분명 한 그루의 나무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다(2:16-17).
그러나 3장에서 최초의 여자는 뱀과 대화에서 이 금지명령에 대해, 단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할 뿐이다(여기서 성경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 뱀이 어떻게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다.
뱀을 다른 인격적 존재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 읽는 이들도 많지만, 우리는 고대인들이 그들의 상식 안에서 이 짐승과 여자의 대화를 있는 그대로 수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2장 9절 이후에 ‘생명 나무’가 다시 언급되는 곳은 이미 하나님의 판결로 인해 부부가 하나님의 정원에서 추방당하는 맥락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생명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었는지(먹었는지) 명시적인 단서를 얻지 못한다.
4) 2장 18~25절의 초점은 ‘동물의 창조’보다는 ‘동물과 인간의 비교’,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다(본문은 일관되게 아담의 짝을 구하는 데 관심을 둔다).
2장 전체에서 흙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은 존재는 ‘여자’뿐이다(남자도 흙에서 창조됐다).
이는 다른 동물들이 아담과 별개의 피조물로 취급되는 데 반해, 여자를 먼저 창조된 아담(남자)와 동등시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는 데 아담의 갈빗대쩰라를 사용하신 것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2:21). 왜냐하면 아담의 갈빗대는 아담의 ‘급소’이기 때문이다(칠십인역은 이 쩰라를 헬라어 플류론으로 번역하는데, 다른 본문에서는 사람의 급소인 ‘옆구리짜드’를 번역할 때 같은 표현플류라을 쓴다; 민 33:55, 삼하 2:16, 겔 34:21 등).
5) 3장 8절의 “그 날 바람이 불 때레루아흐 하욤”는 “그 날 바람으로(영으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히브리 성경은 여기서 1장 2절의 태고의 바다(심연) 위로 임재하셨던 “하나님의 영-바람루아흐 엘로힘”을 환기하는 것이 거의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현현) 양식은 앞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가장 먼저는 노아의 홍수 때; 창 8:1) 다시 등장할 것이다.
6) 3장 5절의 “하나님과 같이 되어”는 “신들과 같이 되어”로 읽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
칠십인역(고대 유대인들이 사용한 구약성경 헬라어 번역본)도 히브리어 엘로힘을 헬라어 쎄오이(“신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독법의 타당성은 22절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부부가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언급에서 확증된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 않고 “하나님(들)과 같이 된”다는 뱀의 예고가 일견 진리였을 뿐만 아니라(하나님은 아담에게 그가 선악과를 따먹는 ‘그날’ 죽게 될 거라고 경고하셨지만, 결국 아담 부부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도 비록 하나님의 정원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오랜 기간 목숨을 부지했다), 선악과가 하나님의 천상 공동체(하나님과 그 천사들)와 인류(하나님의 지상 공동체)의 신분을 나누는 지표였음을 뜻한다.
이는 인류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 천사들의 형상 역시 반영하는 존재임을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인류가 지상에서 누리는 ‘특별한 존재(하나님의 형상 됨)’로서의 본질은, 먼저 ‘그 이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천사들의 신성한 삶과 일과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다(칠십인역은 시편 8편의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의 엘로힘을 “천사들앙겔로이”로 번역했다).
7) 창세기 1~3장은 이러한 위계질서(서열)를 표현하기 위해 ‘생명 나무’와 ‘선악과’뿐만 아니라, ‘먹는 문제 자체’를 동원한다.
1장 29~30절은 동물의 먹거리(“모든 푸른 풀”)와 인간의 먹거리(“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구분하고 있다.
즉, ‘인간에게 허락된 음식 대 금지된 음식(모든 곡식과 과일 대 선악과 열매)’를 통해서는 인간과 신적 존재들의 구분이, ‘동물에게 허락된 음식 대 금지된 음식(모든 채소 대 곡식이나 과일)’을 통해서는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설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는 뱀(“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의 질문이 사실, 뱀의 대화 상대였던 ‘여자’보다는 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뱀은 음식의 경계를 통해 신분적 질서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방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뱀은 먼저 여자와 뱀 자신의 구분(모든 나무 열매에 대한 금지)을 환기하며, 여자가 금지된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과 천사 또는 하나님의 구분(선악과에 대한 금지)을 무효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가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다시 보게 된 것은, 평범하게(합법적으로) 여자가 먹을 수 있었던 음식(2장 9절의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와 비교해보자)과 금지된 음식 사이의 구분이 흐려지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더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음식=신분의 설정)은 뱀과 여자와 남자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서도 잘 드러난다.
뱀은 다른 미물들 중에 저주를 받고, 모든 동물에게 허락된 “채소” 대신 “흙(3:14)”을 먹어야 하며, 여자와 남자도 원래 먹을 수 있었던 생명 나무 열매를 포함한 “나무 열매” 대신 “밭의 채소(3:18)”를 먹어야 한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죄인들의 지위를 강등시키는 수단으로 ‘먹는 문제’를 활용하신다.
8) 사실 3장 21절의 “가죽옷”은, 대다수의 신학자/주석가들이 이를 긍정적인 방식(예컨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희생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과 반대로, 매우 부정적인 메시지를 뜻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는 행위는,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미물에 불과한 ‘동물과 동일시’되는 장면일 수 있다(예컨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표현을 통해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을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창세기 2~3장은 ‘먹는 문제’ 뿐만 아니라, ‘입는 문제’를 통해 신분적인 질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창세기 1장이 사람을 하나님의 권한 대행자로서 모든 미물들 위에 ‘왕노릇’한다는 사상을 표현한 것처럼, 창세기 2장도 역시 아담이 미물들에게 하나님처럼 ‘통치’하는 장면을 묘사한다(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마치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며, 낮과 밤과 하늘과 바다와 땅에게 이름을 붙이신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여기서 하나님과 아담의 ‘이름 부르는 행위’를 묘사하는 히브리어이크라는 완벽히 동일하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은 1장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간에 대한 그림을 하나 더 추가하는데, 이는 인간이 ‘마치 동물들처럼’ 헐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우 권위적인 성경교사들이 이 대목을 단지 타락 전/후 인간의 성적인 욕구(에 대한 통제력 등)나 심리적 기제(이를 인간소외 현상과 연결하는 학자도 있다)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과 달리, 본문은 분명 헐벗음에 대한 수치심 자체를 선악과와 연결한다(“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3:11).
즉, 태초의 부부가 금지된 열매를 먹고 눈이 열려(선악을 아는 일에 신들처럼 되어) 보게 된 관경은, 그들이 짐승처럼 벗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짐승의 가죽’을 입히신 것은, 마치 천사들처럼(하나님처럼) 눈이 높아져 스스로 몸을 숨기는 가소로운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조롱으로 해석될 수 있다(인간에게 짐승들의 먹이인 ‘채소’를 먹게 하신 사실을 떠올려보자).
아마 성경 안에서 이와 가장 비슷한 사례는,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는 예수님께 홍포를 입혔던 로마 군인들의 조롱하는 행위일 것이다.
창세기 1~3장은 아마 성경 가운데 현대인들에게 가장 난해한 본문(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이 잘못 읽히는 본문)에 속할지도 모른다.
이는 고대인들의 세계관 자체가 우리들의 것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전통적인 교리나 신약의 내용들(특히 둘째 아담 사상이나 원죄론 같은 바울 서신의 내용들)을 창세기 1~3장에서 다시 읽어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해석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과학’을 읽어내고, 창세기 2~3장에서 ‘생물학적 힌트’나 ‘지리학’에 대한 힌트를 읽어내려는 시도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물론, 바울과 신약의 저자들(그리고 후대의 교회사 속 성경교사들)이 구약에 대한 경외심 위에 그들의 신학을 정초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후대의 성경 저자들이나 더 늦은 시대의 신학적인 글들을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사실은, 그 새 글들이(신약이나 더 늦은 시기의 주석들이) 순수한 구약 본문 그 자체가 아니라, 옛 글들(구약)을 통해 해석한 새로운 현실(예컨대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이라는 현실이나, 이방인들을 가족으로 영접하는 문제 등)을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구약본문의 역할은, 미래 시대의 사상을 미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시대의 사상이 정초할 수 있는 신학적인 공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에 뿌리내린 후대 저자들의 사상들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구약이 미래 시대의 저자들을 위해 마련한 사상적인 기틀과 공간을 그 자체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창세기 2~3장(창세기 에피소드 2)을 원시적인 상식으로 이해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바 그 메시지는 가히 예술적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특권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을 때, 인간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박탈당하고 동물적인 삶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부족할 것 없이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삶을 시작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거주하는 하나님의 낙원에서 봉사하며, 심지어 미물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다스리며 왕노릇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본문이 암시하는 바, 그들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과일인 ‘생명 나무’를 함께 먹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주어진 복에 만족하는 대신, 분에 넘치는 특권에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추측하건데 그들은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고서도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악과를 먹는 행위가 나쁜 행위임을 인지하고 이에 적절한 태도로 반응하도록 요구하실 수 있었겠는가?
태초의 부부가 탐했던 지식은 아마 순종하기 위한 지식이 아닌, 결정하기 위한 권리였을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며, 스스로 보시기에 “선하다/옳다(창세기 1장)”, “선하지 못하다/그르다(창 2:18)”하셨던 것과 같은 결정권 말이다(“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거나 심판하실 때, 그 천사들과 의논하시는 것처럼(창 1:26, 3:22, 11:7), 그들도 이 세상에 자기 의지를 관철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이는 마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거꾸로 뒤집는 것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일단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되, 우리가 원하는 나라만 임하시오며,
우리가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뜻을 부디 하늘에서도 존중하소서.”
이렇게 말이다.
결국 인류는 반역에 대한 대가를 지고 뱀과 함께 쫓겨나 동물들처럼 죽음에 굴복하는 광야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애초부터 동물들에게는 생명 나무에 대한 권한이 없었음을 기억하자. 즉, 그들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의 수혜자가 아니었다).
물론 창세기 2~3장의 에피소드는 ‘과학적 사실(심지어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많은 내용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예컨대 어떻게 육식동물이 채소만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특권에 만족하며, 그분께 겸손히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또 우리의 첫 부모가 천사들처럼 ‘맞지 않는 음식과 옷’을 탐냈을 때, 정작 먹게 된 음식과 입게 된 옷이 무엇이었는지 늘 기억해야 한다.
정말 우리는 이 아이러니를 철저히 가슴에 새겨야 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1;3-5).”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영광이란 정말 얼마나 큰 영광이던가?
게다가 비록 혹독한 책망과 함께 광야로 밀려난 인류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 복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운 새로운 아이러니는 또 얼마나 신비로운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10-14)?”
주 예수님 안에 진정한 안분지족과 선과 지혜가 있음을 믿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주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자.
그리스도를 먹이시고, 그리스도를 입혀주신 우리 하늘 아버지께 충성을 다하자.
우리의 참된 양식과 의복이 되시는 예수를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