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계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5:1-2 – 하나님의 형상, 아담
5:3-32 – 아담의 형상, 셋과 그를 통해 이어지는 아담의 계보
5:21-24 – 죽지 않고 사라진 에녹
5:28-32 - 인류의 사명과 소망, 노아
1) 본문은 창세기 1~2장의 <하늘과 땅의 계보>를 환기하며, 이를 ‘새로운 계보’와 연결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5:1)”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2: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1:26-28)”
2) ‘아담과 셋’의 관계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반영하는데, 이는 우리가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계보’를 대할 때, 종종 ‘하나님 형상’이라는 개념을 직간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뿐만 아니라 우리는 비슷한 관념이 “~의 후손-씨앗”이라는 어구를 통해서도 종종 표현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1-2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3절)”
3) 아담과 셋의 관계가 핵심적인 관계(하나님 형상의 이념을 계승하는 아담의 계보)로 대두된 것은, 앞선 ‘가인의 계보’를 아담의 적통 계보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설정한 ‘뱀의 후손-씨앗’과 ‘여자의 후손-씨앗’ 갈등 구도에 대한 반영일 수 있다.
4) 줄줄이 이어지는 계보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적장자의 출생과 그 시기(“a는 x 세에 b를 낳았고”),
(2) 비(非)적장자의 출생과 수명(“[a는 또한] b를 낳은 후 y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 사망에 대한 보고(“그는 z[=x+y] 세를 살고 죽었더라”).
구조는 ‘인간이 수명을 다하여 죽는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창세기 3~4장에서 제시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문제의식으로 설정한다).
5) 다시 강조하는 것이 피곤하지만, 성경 계보의 수치를 합산해 우주와 인류에 대한 연대기를 추산하는 일은 정말 무의미한 일이다(우주에 대한 소위 ‘젊은 지구론’라 일컫는 ‘6,000년 연대설’을 고집하는 일은 성경을 ‘더 잘 믿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
6) 계보가 반영하는 인물들의 (비정상적으로) 긴 수명 역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언급이 아닌, ‘현생인류(정상적인 수명의 인류)’와의 괴리감을 형성하는 문학적 장치라고 보는 것이 좋다.
이 ‘원시적’ 인류의 ‘낯선 삶’을 접할 때, 우리는(그리고 분명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조차도) ‘(그들과 우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의문은 창세기 6~9장을 접할 때 비로소 해소될 것이다(물론 우리는 이 기사의 ‘역사성’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이 글귀들이 강조하는 ‘사상’에 관심을 둔다).
7) 계보가 반영하는 ‘에녹의 생애’는 계보에서 ‘이례적인 경우’로 부각된다.
이는 ‘수명을 다해 죽는 운명’ 강조하는 ‘아담 계보의 공식’ 무너뜨리는 의도적인 설정이다(24절을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로 옮긴 개역개정의 번역은, 본문에서 “세상”과 ‘세상 아닌 곳’의 구분을 읽어내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좀 저 정확한 번역은 “없었더라.” 정도일 것이다.
공동번역개정의 번역은 원문을 더 잘 반영한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사실 우리는 에녹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이런 인물에 대한 엄밀한 역사적 재구성은 불가능하다.
어찌 됐든, 본문은 에녹의 ‘실종’을 에녹의 ‘삶의 연장’으로 해석한다).
다만 본문의 의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위해 제공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즉, ‘에녹의 삶’은 (인간의 죽을 운명을 가리키는) 아담 계보 속에서, ‘무너지는 하늘에 뚫린, 솟아날 구멍’이다.
8) 노아의 이름에 담긴 ‘라멕의 소망(인류의 소망)’은 땅을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질서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인류의 사명’과 범죄에 대한 징계로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롭게 일하는” 비참한 처지에 대한 탄식이 역설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기대는 ‘안식일 법’이 표현하는 인류의 사명(‘하나님이 일을 다 마치고 안식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일을 다 마치고 안식한다’)을 자기 후손에게 투영한 것이다.
이는 ‘후손-씨앗’ 사상이 그들의 과업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말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는 뜻이다(좀 더 분명하게는, 그들의 대대로 이어지는 그 과업을 통해서 그들의 종말이 성취될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다는 뜻).
죽음이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운명이면서도 또한 매우 낯선 그 무엇이다.
“죽는다.”
“죽겠다.”
“죽인다.” 등등.
우리는 죽는 말을 실없이 참 많이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벌이는 이런 표현들은 대부분 이 말이 원래 실어 나를 수 있는 그 무게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완화된 화법(표현상으로는 과장된,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약화된 화법)에 불과하다.
이 말이 최선을 다해 그 무게를 실어 나를 때, 이 말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매우 낯선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낯선 말은 사실 거의 유일하게도 온 인류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그래서 사실상 인류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부담스러운 손님(초대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보통 우리가 이 손님을 처음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 곁에 당연하게도 함께 (살아) 있던 누군가가 이 손님의 방문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나게 되는 그 때부터다.
누군가는 이 손님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가까이서 대면해보지 못한 채 삶을 지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을 얼마나 일찍, 또는 얼마나 지근거리에서 경험하게 되든지, 이 손님을 한 번 경험해 본 사람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법이다.
멀찍이서(보통 매체를 통해서) 기척으로만 느껴 왔던 이 낯선 불청객이 그 육중하고 우람한 체구로 우리 시야를 사로잡는 그 순간, 당연하게만 느껴지던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아주 희박하고 불안정한 것들로 돌변해 버린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무거운(진중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죽음은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꾼다.
언젠가는 이 삶이 끝난다는 사실(위기) 앞에 우리는 ‘남은 삶’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다.
이 삶을 후회로 가득 채우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상하게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 ‘삶을 의미로 가득 채워야겠다’는 이 새삼스러운 결심조차도, 죽음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듯 좀처럼 우리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관점이 우리의 인생관을 바꾼다.
그래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도 자기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망자(亡者)’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카르페 디엠("현재를 붙잡으라")을 속삭인다.
오늘 허비하고 있는 삶이 언제까지고 당연하게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말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5장의 계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하나의 중대한 문제의식이다.
따분하게 나열되는 낯선 이름의 행렬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낯선 한 이름을 반복적으로 발견한다.
바로 ‘죽음’이다.
진지한 인생관을 포함하는 사상은 반드시 죽음에 대한 교훈 역시 진지하게 취급할 것이다.
또 이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꼭 필요하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취급할지 역시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성경이 고른 이 지점은 고려될 수 있는 지점 중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지점일 것이다.
성경의 커리큘럼은 삶과 죽음을 그 출발점(창세기 1~5장)에서부터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망자들의 사진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붙잡으라.
후회 없는 삶을 택하라.
아담의 계보도 우리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다그쳐 온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보람 삼아 살 것인가.
죽음 앞에서도 유지되는 보람은 무엇인가.
죽음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가.
죽음은 진정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모든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죽음조차 죽이지 못하는 삶은 있는 것인가.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