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분
4:1-15 – 가인이 질투심 때문에 아벨을 죽이고, 비옥한 땅으로부터 쫓겨나고, 하나님이 가인에 대한 보복적인 살해를 칠 배의 형벌로써 금하시다.
4:16-24 – 가인의 계보: 가인의 후손 라멕(육대손)이 소년과 다투어(보복하여) 그를 죽이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칠십칠 배의 형벌을 주장하다.
4:25-26 –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 아담의 계보를 이을 셋이 태어나고, 셋의 아들 에노스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1) ‘가인-아벨 형제의 출생 및 갈등’은 창세기 3장에서 설정한 복선을 회수하며 심화한다.
창세기 3장에서 뱀과 여자와 아담은 선악과 사건에 대한 심판으로,
(1) 각각 자기 지위에서 누리던 처우대신 강등된 처우를 받았으며,
(2) 사는 동안 애환을 겪게 되었고,
(3) 자신과 긴밀했던 대상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벌을 받게 되었다.
여기 창세기 4장에서 심화되는 복선은 창세기 3장 15, 20절에 기록된 ‘뱀과 여자 간의, 그리고 그들의 후손 간의 적대관계’와 하와의 ‘모든 산 사람의 어머니 됨’이다.
창세기 2~3장은 분명 ‘뱀’을 인간 이하의 피조물들(동물들)과 동등시하지만, 몇 가지 근거 때문에 이 뱀을 상징화된 인격체로 생각할 수 있다.
(1) 뱀은 다른 신화에서도 종종 천지창조나 신적 정원과 연결되는 신적 존재로 등장한다.
(2) 히브리 정경에서 실제 동물 뱀(파충류)과 인류(여자의 후손; 성경에서 하와는 온 인류의 어머니다)의 갈등이 핵심적인 갈등으로 대두되지는 않는다(종종 실제 뱀이 성경 인물들의 사건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뱀과 사람의 갈등이 요점인 경우는 없고, 단지 상징적인 소재로 등장할 뿐이다.
다른 경우 뱀은 대부분 하나님과 히브리 민족의 대적자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3) 후속하는 성경 서사에서 주된 갈등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신들의 갈등’과 ‘하나님의 백성과 적대세력의 갈등’으로 표현된다.
(4) 신화적 장르에서 동물은 특정 민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예: 단군 신화의 토테미즘).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창세기 3장의 복선은 후속하는 성경 서사를 ‘참다운 인류와 그 원수들의 갈등’으로 바라보게 하는 문학적 장치이며, 창세기 4장의 갈등은 이를 심화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가 ‘톨레도트(계보)’와 서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은, 후속하는 서사뿐만 아니라, 후속하는 계보들 역시 이 두 후손 간의 갈등을 통해 해석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후손-씨앗쩨라'는 창세기 계보와 서사를 해석하는 데 핵심적인 키워드다).
2) 가인과 아벨이 각각 드린 제물은 제물로서의 적합성 또는 우월성과는 무관하다.
즉,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여호와의 수용 여부는 그들이 ‘무엇을 드렸는지’와는 전혀 상관없다.
혹자는 동물의 생명을 희생하는 제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데 더 적합한 ‘합법적인 제사’라고 주장하겠지만,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오히려 구약의 제사법에 등장하는 여러 제사를 더 직접적으로 예견하고 있으며, 구약의 제사법은 동물을 희생하는 제사뿐만 아니라, 곡식을 조리하여 드리는 제사도 합법적인 제사 양식으로 포함하고 있다.
3) 정작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차이를 가져온 것은, 그들이 ‘어떤 제물을 드렸는지’ 보다는,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는지’와 더욱 관련이 깊다(오히려 가인과 아벨의 제물 자체는 그들의 생업과 연결된다. 즉,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에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심지어 목축문화가 농경문화와 보다 열등한 것으로 묘사되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제물의 질’이 좋은 것은 가인의 제사였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어떤 점에서 그들의 태도를 반영했는지 살펴보자.
(1)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그들의 ‘삶에 대한 결산(농업은 농산물로, 목축업은 축산물로)’일 뿐만 아니라, 제사자 자신들과 직접 연결된 것이었으며,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수용 여부’는 ‘그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수용 여부’로 묘사된다(“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2) 가인은 “세월이 지난 후에”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3) 가인은 자신과 자신이 드린 제사가 실패한 것을 스스로 통탄해하며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대신, 아벨을 질투함으로써 그 본질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4) 아벨은 제사로써 하나님을 상대했으나, 정작 가인은 하나님이 아닌 아벨을 상대했다(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과 아벨만의 대화였으나, 가인의 제사는 아벨과의 경쟁이었다. 즉, 아벨이 제사한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지만, 가인의 제사의 결과는 아벨보다 나은 가인이었다. 따라서 아벨의 제사 속에서 하나님은 아벨에게 ‘당신’으로서의 인격이었으나, 가인의 제사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소외된 인격이었다).
4) 7절의 ‘가인에 대한 죄의 호소(죄에 대한 의인화)’는 창세기 3장 16절의 ‘남편에 대한 여자의 호소’를 환기하는 표현이다.
즉, 여자와 남자의 소원해진 관계가 ‘남편을 지배하고자 하는 여자의 욕망’과 ‘남편이 여자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고 할지라도 가인이 죄를 지배하여 그 목적을 좌절시키라는 의미다.
물론 여기서 ‘전적 부패’의 교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오히려 이 교리는 창세기 11장까지 전개되는 서사 전체로부터 유추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은 에덴동산뿐만 아니라, 동산 밖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결하신다.
이는 사람이 세상사를 결정하고 판결하는 권한을 탐했음에도 불구하고(선악과 사건) 정의롭게 행하는 데 미숙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이 땅에 임재하실 때, 그곳은 예배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법정이 된다.
보통 사람은 이 법정에서 의인이나 죄인으로 밝혀질 피고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천사들은 하나님의 판결에 동참하는 패턴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 서사를 따라 ‘참다운 인류’는 점차 하나님을 경외하는 ‘천사들과 함께’ 아니, ‘천사들까지도’ 판결하는 하나님의 증인이자 동료 판사들로 그 지위가 격상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여기서는 땅과 피가 판사이신 여호와께 호소하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가인은 그저 피고인일 뿐이다.
6) 12절의 ‘저주’ 판결은 3장에서 아담이 받은 판결(동산 밖에서 힘겹게 농사 지을 것)을 심화한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표현은 ‘목축과 유랑의 문화’를 ‘정착과 농경의 문화’와 비교하며 ‘질 나쁜 삶’으로 묘사한다.
이는 이 판결로 인해 가인과 아벨의 처지가 역전되었음을 시사하며, 후속하는 성경 서사를 ‘정착-농경의 생활’과 ‘목축-유랑의 생활’의 관점에서 읽도록 유도하는 장치다(예컨대 ‘족장들의 유목생활과 애굽인들의 정착생활’을 대조하거나 ‘출애굽 백성의 광야생활과 애굽인들이나 가나안인들의 정착생활’을 대조하는 식으로 말이다).
7) ‘가인의 표’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하며, 사람이 (심지어 그 대상이 살인자이자 원수라고 할지라도) 보복을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는 하나님이 사법적인 판결과 형 집행의 권한을 인간 사회에 위탁하기 전까지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반대로 형벌로서의 살인은 창세기 9장에서 정당화된다).
8) 창세기 계보가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반영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계보는 과감한 방식으로 역사를 생략할 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의 역사 인식이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순진한 생각이다(이쯤에서, “가인이랑 아벨이랑 셋 밖에 안 나오는데 어떻게 결혼하고 애를 낳았을까?”하는 종종 제기되는 의문 역시 무의미한 질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주기 바란다. 도대체 정말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 아담과 하와와 가인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면, 가인은 누구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했을까?).
본문의 표현에는 집중하되, 역사에 대한 인식은 “대충” 받아들이고, 본문이 전달하는 요점(메시지-이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9) 가인의 계보를 마무리하는 라멕 이야기는 가인과 아벨의 갈등을 심화하며(가인은 아벨을 일방적으로 살해했지만, 라멕과 라멕이 죽인 소년의 경우 서로 상해를 주고받았다.
즉, 서로 죽이려 했다.
또 가인과 아벨은 서로 동년배였으나 라멕의 피해자는 상대적으로 연소했던 것 같다.
게다가 가인의 경우,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칠 배’의 벌로 그에 대한 복수를 금지하셨으나, 라멕의 경우, 그가 자의적으로 ‘칠십칠 배’의 벌을 제시한다) 사람으로 인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비극에 주목한다.
이는 사람의 죽음을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하는 서사적 장치다(4장의 계보는 ‘사람이 사람에 의해 죽는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사람이 수명을 다해 죽는 문제’에 대하여 함구하지만, 5장의 계보는 이 ‘사람이 수명을 다해 죽는 문제’를 직접 취급한다).
10) 26절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표현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관용구이거나, 여호와께 대한 제사 행위를 가리키는 환유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고대인들은 신의 이름에 신의 권능이 담겨있다고 믿었으며, 신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신의 현현을 촉구한다고 여겼다).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그 동안(창세기 1~3장)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줄곧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셨던 데 반해, 여기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불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주체와 객체의 독특한 관계를 시사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은 그 동안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에노스의 때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을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로소아즈”가 이 행위를 ‘최초의 행위’로 만드는지, 아니면, 일정 기간 중단되었던 행위의 ‘회복 또는 재개’로 만드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의 해석이 맞다면, 가인과 아벨의 갈등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에노스로 인해 다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 셋-에노스의 가계가 아벨을 대신하는 ‘여자의 후손-씨앗’ 계보 즉, ‘참다운 인류’의 계보라는 것과 이 ‘참다운 인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는 메시지는 명백하다(‘에노스’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말로, ‘아담’과 동의어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그리고 라멕 이야기와 에노스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람의 진정한 본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이 그 본분을 떠났을 때 어떤 괴물이 될 수 있는지 교훈한다.
먼저 사람의 참된 본분이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그들이 사는 삶(일상 또는 일생)에 대한 결산이었다.
즉, ‘삶이 더러운 사람의 깨끗한 예배’라는 말은 완벽한 모순이다.
이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사실 예배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삶도 예배의 연장선이라는 말로 삶과 예배를 연결지어, 그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예배가 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배가 삶의 연장선이다.
삶을 쌓아올려 예배로 꽃피우는 것이 옳게 된 서순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가 이 본분을 지키는 데 실패하는 만큼 우리는 사람으로 사는 데 실패하게 된다(그도 그럴 것이 이는 사람의 본분이다).
가인은 얼마든지 가인의 제사를 받아주셨을 하나님보다 아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가인은 결국 자기 동생을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가인은 이를 우발적으로 범하지 않았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기 위해 가인의 양심을 응원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물리치고, 아벨을 한적한 곳으로 유인해 목격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라멕의 이야기에서 더욱 심화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죽고 죽이는 갈등 양상은,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이 단지 수명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동물적인 삶으로 격하되었음을 암시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데 실패했을 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데도 실패하게 되고, 결국 사람으로 사는 삶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인간 실패’의 길을 피하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며 사는 길을 분명한 언어로 가르쳐준다.
그것은 심판자이신 여호와를 상대하며 사는 삶이다.
마치 가인이 자기 죄를 여호와 앞에 숨기지 못한 것처럼, 결국 모든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해명하게 될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