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에 대한 보론

성경이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가족윤리'를 정당화하는 문제에 관하여

by 임지성의 생각



창세기 1~3장 본문


1장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장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3장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질문1 성서가 하나님의 뜻을 오류 없이 전달하는 계시이므로, 성서가 특정 사회제도나 이데올로기를 지지할 때, 우리가(기독교인은) 성경을 믿고 따르기 위해 동일한 사회제도나 이데올로기를 현대사회에서 재생산해야하는가?


질문2 창세기 1~3 기사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가족윤리(이하 남가윤)를 정당화하는가? (그래서 우리도 남가윤을 현대사회에서 재생산하도록 노력해야하는가?)

* 질문1과 2를 모두 긍정한다는 것은, 질문2의 괄호 안에 있는 주장에도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입장은 질문1에는 부정하지만, 질문2에는 긍정하는 것이다.

나는 성서를 믿고 적용하는 기독교인이 성서가 지지하는 사회제도나 이데올로기를 무조건적으로 재생산하는 것보다는 더 근본적인 메시지를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서가 동조하는 당대의 문화가 있을지라도, 성서가 그 문화를 수용(비판)하는 방식에 더 초점을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성서가 애써 입을 열어 무언가를 주장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성서가 남가윤을 당연시한다고 할지라도, 성서가 당대에 당연시되고 있었던 남가윤을 비판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두자고 주장한다.


성서는 종종 특정한 사회제도를 지지하거나 반대한다.

그러나 성서가 그렇게 할 때에는, 단지 그것이 사회 속에서 이미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에 특정 견해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데 동조하는 것 아니다.

만약 성서가 ‘이미 요모양, 요꼴인 세상’을 순진하게 정당화하는 책일 뿐이라면, 우리는 고고학과 역사학을 통해 다른 더 좋은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성서는 당대에 당연했던 어떤 생각의 틀을 깨부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더 본받기 마땅한 중요한 내용이다.


성서는 명백히 남가윤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이 남가윤의 어떤 측면을 명백히 비판하고 있다.

성서가 당연시 하는 데 동참하면서도 그 안에서 결코 당연시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측면은, 남가윤에 의한 여성의 소외,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적 태도이다.

성서는 남자에게 가정의 주도권과 책임을 지우는 당대 문화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뿐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런 문화 속에서 (마치 다른 신화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성이 남성 이하의 존재로 취급되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는 일관되게 여성을 동물과 대조하며 남성과 동등시하지, 그 반대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아담은 온갖 짐승들을 보았지만, 자신과 동등한 온톨로지컬 비잉 곧 대자를 발견하지 못했다(하이데거-사르트르). 그것들은 온통 온틱 비잉들 곧 즉자들뿐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여자를 보았을 때, 그는 마침내 자신과 동등한 그녀(주체)를 발견했다.

게다가 성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정 내 착취와 소외를 명백히 창조의 결과가 아닌, 타락의 결과로 제시한다(물론 성서는 남성을 여성보다 아래에 두는 식으로 여성을 높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성서는 명백히 가족문화에 대하여 남가윤을 당연시하는 풍조에 가담한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남자는 멍청해서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창세기를 읽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를 보니 그 친구의 주장은 일반화될 수 없는 주장인가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가 남가윤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이런 문화를 현대사회에서 재생산해야 할까?

아니면, 성서가 당대의 남가윤 속 착취적이고 소외적인 측면을 비판하기 때문에, 우리도 현대 사회의 가족윤리와 성문화 속 착취적이고 비인간적인 관습을 반대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할까?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의 길이 더 ‘신앙적인 길’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이런 초점은 사람(남녀)이 하나님처럼 왕노릇하면서도 (신적 존재가 되려다가 동물적 존재로 전락하기보다는 안분지족하며) 인간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창세기 1~3장 전체의 논지에도 잘 들어맞는다(설마 우리 사회가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죄가 야기한 결과를 강화하며 특정 성별이 인간성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경향을 지지해야 하겠는가?).


첨언 굳이 언급하겠는데, 창세기 3장에서 원죄론과 모형론적 메시아 사상을 발견하려는 시도(바울신학을 모세오경에 이입하려는 시도)는 공허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모세오경의 사상이 바울의 사상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바울이 모세오경을 존경했으며, 바울의 생각이 모세오경의 생각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바울의 생각과 모세오경의 생각이 동일한 생각이라는 쪽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시도는 성경의 일관성을 상정한 채 진행되는 ‘성경신학’ 프로젝트에서나 허용되는 최대주의적 해석(성경적으로 가능한 많은 사상을 본문에서 이끌어낸다)이지, ‘저자의 의도’에 집중(최소주의적 해석; 본문에 명백히 표현된 것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내지 않는다)하는 주석 작업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시도다.


내가 이미 갖고 있는 편견을 강화하기 위해 상대의 말과 글을 듣거나 읽지 말자.




창세기 4장 - 사람의 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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