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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23. 2024

6.1 - 신화의 계보

6 - ‘나’ 빼앗는 이야기 투쟁



반복해서 종교와 신 이야기(신화)를 언급하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라는 존재 의미를 희석하는 가장 유서 깊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의 가장 오래된 방식이 바로 신화라는 것이다. 신화는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라는 부분적인 카테고리(또는 장르)로 분류된다. 하지만 고대사회에서 신화는 그저 세상을 이해하는 아주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신화는 세상에 대한 설명력을 띤 채, 한 민족의 상식을 주조해 내는 이야기 장르였다. 특정한 신화가 제시하는 바로 그 방식대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신화는 다분히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이었다.

사진: Unsplash의 Alexandros Giannakakis

그래서 한 신화 안에서 상식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웃들끼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공유되지만, 다른 신을(다른 신화를) 믿는 이민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세상에 대한 해석 권한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야기했던 것이다. 이 투쟁은 빈번하게 물리적으로 폭력을 동반하기도 했다. 신화가 현대 사회에서 ‘종교’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된다고 했지만, 현재까지도 종교 때문에 발생하는 (테러리즘을 포함하여) 분쟁ㆍ전쟁의 사례가 있을 정도이다. 신화는 세상을 해석하는 권위적인 내러티브이며, 그 안에서 개인(나)의 의미 또한 결정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한 신화를 부정하는 행위는 그 이야기 속에 포함된 나의 존재 의의마저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서양 사상사 속에서 그리스 철학을 통해 ‘스스로 한번 생각된 세상과 나’라는 불온한 사유가 태동한 뒤, 신화는 ‘다른 신화’ 이외의 새로운 해석 권한의 투쟁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 ‘믿음과 이성’의 유구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무려 고대로부터 말이다. 믿음과 이성의 세상에 대한 해석 권한의 투쟁, ‘신의 이야기로 세상을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구상해 낸 이야기로 세상을 해석할 것인가.’의 대결은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하지만, 결국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사조의 태동과 함께 신화는 이 투쟁에서 패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인본주의적인 사조에서 비롯된 계몽주의 사상으로 인해 세상은 ‘이성을 통해 설명되어야 된다’는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성을 통해서 해석된 세상 이야기’는 중세 시대의 세기말적 현상이자, 근대정신의 본류를 형성하는 새로운 신화였다.

* 아이러니한 것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 같은 종교학자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신화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 신화 속에 부단히 자기 자신을 투영해 낸다는 점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성을 통해서 세상과 인간과 ‘나’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을 통합한다는 기획 역시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성을 통해서 이해된 세상, 그리고 이성을 통해서 세상을 건설해 나가는 방식이 이상적인 세상을 향한 진보라는 낭만 어린 시도가 또 다른 오류와 비극을 재생산했기 때문이다. 이성을 통해 발견해 냈다는 그 기술이 이 자연과 사람 사는 세상을 아주 잠시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새로운 억압과 병폐, 또 다른 부조리 역시 그 속에서 나왔다.


결국 또 사람은 ‘나 자신’을 그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반복적인 실패의 역사는 내가 아닌 것에서 나를 찾고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신화 속에서 내 존재를 찾는 시도와 그 실패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니까 정지우 작가는 각 시대가 저마다 개인에게서 의미를 빼앗는 시도를 해 왔다고 적절하게 통찰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이 ‘내가 아닌 것들 속에서 나를 찾으려다 실패해 온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화라는 이야기를 찾는다던가, 그런 내러티브가 적힌 신비한 책들을 탐구한다던가, 아니면 자연환경과 사람들 사는 모양새를 관찰하고, 그것을 논리적인 언어로 기술한다던가, 결국 다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정지우 작가의 에세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살던 세상 이야기 하나가 붕괴할 때마다, 함께 무너질 것 같은 ‘나’의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다시금 신묘한 이야기 속으로 회귀한다. 그러다 증강된 관찰 능력 때문에라도 거부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일파만파 불어나게 되면, 결국 이야기는 설명하지 못한 부분만을 남겨 둔 채, 면류관을 내려놓고 뒤안길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나’를 포함했던 한 세상도 같이 붕괴하고 세기말의 데카당스가 반복되는 것이다.



사진: Unsplash의 NASA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내 몸 어디에도 영혼은 없었고, 망원경으로 들여다본 세상의 중심은 평평하지도 않았고, 사실 중심조차 아니었다.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 본 곳에도 “신은 없었다.”* 간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끝이 없는 허공뿐이었다. 세상을 남김없이 해석해 줄 것 같았던, 사유의 기술이 도시를 증발시키고, 낭만적인 이상사회를 구축하자던 이론들은 상대편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 또 다른 신화로 밝혀졌다. 편의를 위해 고안된 기계장치들은 사람의 터전을 빼앗고 사람을 부품 삼아 작동하기 시작했다. 자본을 통해 이기심이 다른 구성원들의 이득으로 환원된다는 아이디어도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 자체로 ‘나’를 위한 공간을 창출해 낼 수 없었다.

*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해 우주비행을 마치고 귀환하여 했다는 발언의 일부.


내 밖에서 나를 찾으려는 노력, 내 밖에 있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뒤바꾸는 시도 내 것이 아닌 이야기를 내 것으로 착각해 온 ‘할루시네이션’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신화의 시대도 끝났다. 이성의 시대도 물러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고, ‘내 이야기’는 어떻게 누구의 손에 쓰여야 하는 걸까?


이어지는 글 : 6.2 - 넘쳐나는 ’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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