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현들의 저술 혐오 :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고대의 현인이 직접 저술을 기피했던 경우가 몇 있다. 소크라테스, 예수, 부처 등이 그렇다. 이들 모두 저작물을 남기지 않았는데, 그 이면에는 문자화된 언술이 자의적 해석에 취약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있다.* 저자가 살아 있는 동안,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권위를 통해 보존된다. 그러나 저자의 생애은 저작물의 생애보다 짧다.* 따라서 저자가 죽은 뒤 저작물(텍스트)은 울타리를 떠나, 오염 가능한 세계에 속에 면역 없이 던져진다. 바로 이 '오염 가능성' 때문에 선현들의 마음 속에 저술 혐오가 피어났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떠난 세상에서 그들의 교훈과 의도가 오염되는 것이 싫었다.
* 사람 마다 '선이해' 즉, 배경지식이 다르니까.
* 따라서 텍스트가 된 모든 언술은 일종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2.
선현들의 저술 동기 1 : "문자는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적인 계승자들은 세상을 떠난 스승님의 언어를 기어코 텍스트화했다. 화자 없는 서술이 텍스트가 된 것이므로, 이미 이 시점부터 스승님이 우려했던 '2차 창작'은 시작된 것이다. 스승님의 언어를 소재로 책을 쓰는 수제자는, 이 저술 활동을 통해 스승님의 말에 대한 해석 권한을 찬탈한다. 이제 후손들이 위대한 스승님 말씀에 접근하려면, 이 '찬탈자'들의 저술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를 저술한 플라톤, 예수를 저술한 제자들, 부처를 저술한 제자들이 모두 그 사례다.
3.
선현들의 저술 동기 2 : "오염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저자들이 스승님의 해석 권한을 탈취했다고 해도, 그들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저작물 역시, 재차 '저자의 부재'와 '오독의 가능성'을 직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스승들이 혐오했던 저술 활동에 착수한 것일까?
이들이 보기에 '오해'는 텍스트만의 한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화자가 죽으면, 그들의 의도는 연명을 위해 계승자들의 화술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오염된 언술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영상 녹화 기술이 없었던 고대 시대에는 화자 없이 그 발언의 원본을 복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후대에 구전되는 교훈들의 오염의 정도는 계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텍스트도, 구전 전승도, '오해'를 피할 수는 없으며, 텍스트가 없는 언술은 더욱 그 '오염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
4.
저술 활동의 의의 : "오염은 축복이다."
구전 전승도 저술 활동도 오해를 피할 수 없었다면, 도대체 저술 활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해체(또는 탈구축, deconstruction)'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자끄 데리다의 관점을 참고해 본다. 그는 선현들이 염려했던 이 '오해'야 말로, '독해' 활동을 가치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데리다는 '오독'이 갖는 긍정적 의미에 주목했다. 그에게는 '독해'가 곧 '오독'이고, '오독'이 곧 '독해'인 것이다. 저술가, 저자는 자신의 문자열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해석자, 독자는 '읽는 행위'를 통해 그 의미를 파괴해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의 종말'이 아닌, '의미의 재탄생'이다. 저자와 달리 저작물은 영생한다. 그리고 그 막강한 생명을 통해 온갖 다양한 맥락과 독법을 마주하며, 저자의 아이디어를 재생산해 낸다.
즉, '저술-해석'은 필연적으로 오독을 수반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저술된 텍스트는 오염과 동시에 항구적인 재생산 능력을 발휘한다. 애초부터 '저술-해석' 활동, '텍스트 생산' 활동은 저자의 생각을 철저히 복제해 내는 활동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기존의 생각 위에 새로운 사고를 탄생시키는 산파술에 가깝다. 텍스트 위에 저자가 미처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의도가 피어날 때, '저술-독해'는 비로소 의미 있는 활동이 된다. 게다가 이렇게 재탄생하는 사고 안에는 저자의 '생각 유전자'도 담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의 존재 의의다.
그래야 했다. 그러나 영상 매체가 등장해 버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