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화되지 않은 살인, 이기적/일탈적 자살, 불법 낙태, 비자발적 반출생주의'는 모두 개인 또는 실존이 '사회' 속에서 의미론적인 융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는 인간의 생존과 자유를 옥죄는 구조와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사회과학과 철학의 대응은 구조와 상황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구조는 경제적이거나 제도적인 형식을 갖춘 체계이며 역사적으로 정당화된 법이라는 텍스트로 표현되어있다.그리고 상황은 정태적이거나 동태적일 수 있으며, 정태적으로는 구조화되어있고, 동태적으로는 정치화되어있다. 이러한 조건(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조건) 속에서 사회와 개인은 통합되거나 분열되며, 개인과 개인은 갈등하거나 타협하거나 결집함으로써 구조 및 상황에 대응하게 된다.
나는 특히 대한민국의 사회과학(제도적 개선을 수반하는 정치공학을 포함)과 자연과학(기술 개발을 포함)이 처음 나열했던, 반인륜적 행태들을 재생산하게 만드는 반인륜적 조건들을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 철학, 인문학의 시급한 목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도 정말 잘못된 구분이지만 '문과생들과 이과생들'은 이제 더 이상 교육 제도가 형성해 놓은 자기 정체성을 계속 고집하고 재생산할 여유가 없다.
비자연과학 및 비이공계열의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이 정말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생태를 선험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명찰하고 발언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면, 이제 그 잘난 특권으로 계속 떠들어야 한다.
진영과 편견이 아니라 현실과 문제 의식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절호의 기회도 똑같은 실수의 반복으로 낭비될 수밖에 없다.
정치 담론은 개인의 문제를 모두의 것으로 바꾸는 활동이며, 모두의 문제 속에서 개인을 재발견하는 대화이다. 나이, 성별, 정당, 지역, 이론, 분야 등은 전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해체되어 마땅한 '나쁜 패러다임'이다. '나쁜 패러다임' 또는 '나쁜 형이상학'은 결국 민주주의의 담론을 허수아비 공격 또는 쉐도우 복싱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기만과 왜곡의 기제이며, 이는 진짜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속인다는 점에서 가장 나쁜 것이 된다.
상황과 구조의 문제를 극단화, 양극화, 양비화하는 정치 행태는 늙은 뱀이하든, 젊은 능구렁이가 하든 더 이상 용서되어서는 안 된다. 유권자가 의견을 듣고 대안을 찾는 정치 행태를 지지하는 대신 실체 없는 명분과 상징만을 재생산하는 행태를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연옥으로 기어들어가는 것과 다름 없는 짓거리다.
아래는 Grok 3가 생성한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과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자살에 대해 가상 대화 시뮬레이션이다. 뒤르켐은 사회학자로서 자살을 사회적 요인으로 분석한 《자살론》(1897)의 저자이며, 카뮈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시시포스의 신화》(1942)에서 자살을 철학적 문제로 다룬다. 이 대화는 두 인물의 사상을 반영하여 그들의 관점을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자연스러운 대화 흐름을 유지하는 것을 시도하며 진행된다.
장소: 파리의 한 카페, 20세기 초의 분위기. 뒤르켐과 카뮈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뒤르켐: 카뮈 선생, 자살에 대한 당신의 철학적 탐구를 읽었습니다. 흥미롭더군요. 하지만 저는 자살을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봅니다. 개인의 절망이 아니라 사회의 통합과 규제 정도가 자살률을 결정한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뮈: 뒤르켐 교수님, 《자살론》은 저에게도 큰 자극이 됐습니다. 사회가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살을 먼저 철학적 문제로 봅니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기죠. 이 질문은 사회적 요인을 넘어 존재의 근본적 문제로 이어집니다.
뒤르켐: 흠, 그 질문은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된다고 보시는군요. 하지만 저의 연구에 따르면 자살은 개인의 심리적 상태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기적 자살은 사회적 통합이 약할 때, 즉 개인이 공동체와 유대감을 잃었을 때 발생합니다. 반대로 이타적 자살은 사회가 개인에게 지나치게 강한 규범을 강요할 때 일어나죠. 사회 구조가 자살의 패턴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카뮈: 흥미로운 분류입니다. 하지만 교수님, 사회적 통합이 약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지는 않죠. 결국 개인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저는 삶이 부조리하다고 봅니다. 인간은 의미를 갈구하지만, 우주는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죠. 자살은 이 부조리에 대한 하나의 응답일 수 있지만, 저는 그것이 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뒤르켐: 부조리라… 흥미로운 개념이군요. 하지만 저는 자살을 그런 추상적 관념보다는 구체적 데이터로 접근합니다. 예를 들어, 제 연구에서 가톨릭 지역의 자살률이 프로테스탄트 지역보다 낮았습니다. 이는 가톨릭 공동체의 강한 사회적 결속 때문이죠. 또, 경제 위기나 전쟁처럼 사회적 혼란이 커질 때 숙명적 자살이 증가합니다. 개인의 부조리한 감정도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카뮈: 데이터는 중요하죠, 교수님. 하지만 숫자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말한 것처럼, 자살은 삶의 부조리를 직면했을 때 나오는 충동입니다. 시시포스는 끝없이 바위를 굴리는 무의미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반항하며 살아갑니다. 자살 대신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의미가 없어도 삶을 지속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뒤르켐: 그 반항의 태도는 개인의 선택처럼 들리지만, 저는 그마저도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개인이 강한 가족이나 공동체의 지지를 받으면 부조리한 감정도 극복할 가능성이 높죠. 반대로,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적 규범이 무너져 개인이 방향성을 잃을 때 발생합니다. 현대 사회의 아노미(규범 부재)가 자살률을 높이고 있지 않습니까?
카뮈: 아노미, 좋은 지적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방향을 잃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저는 그 혼란 속에서도 개인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살은 부조리에 굴복하는 행위지만, 반항은 그 부조리를 껴안고 계속 나아가는 선택입니다. 교수님의 아노미는 어쩌면 제가 말하는 부조리의 사회적 표현일지도 모르겠군요.
뒤르켐: 흥미로운 연결이군요, 카뮈 선생. 어쩌면 우리는 같은 문제를 다른 렌즈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자살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통합을 강화하고 규범을 안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당신은 개인이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반항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보시는군요. 이 두 접근이 서로 보완될 수 있을까요?
카뮈: 가능하다고 봅니다, 교수님. 사회가 개인에게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면, 부조리와 맞서 싸울 힘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그 사회가 지나치게 억압적이거나 의미를 강요한다면, 개인의 반항은 더 어려워지죠. 어쩌면 우리는 둘 다 필요합니다—사회적 연대와 개인의 자유로운 반항.
뒤르켐: 동의합니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를 떠받치죠. 자살이라는 비극을 줄이기 위해, 사회는 연대를, 개인은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할 겁니다. 카뮈 선생, 이 대화 덕에 제 사회학적 관점에 철학적 깊이가 더해진 느낌입니다.
카뮈: 저 역시 교수님의 사회적 통찰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자, 부조리한 세상에서 한 잔 더 마시며 계속 이야기해볼까요?